<한-독 청년통일마당 취재 기사 시리즈 4>
흡수통일이란 단어
통독선 사용 안해
가입통일이라 해야
독일 통일조약작성에 직접 참여한 쉬납아우프 박사(현 한독통일자문위원회 위원)
한국에서는 독일 통일을 서독의 ‘흡수통일’이라고 일컫는다. 동서독이 통일 조약을 맺었고 동독이 연방에 가입한 것이라도 ‘흡수됐다’는 한국의 시각은 부동이다. 그러나 정작 독일 통일조약 작성에 직접 참여했던 크라우스-디터 쉬납아우프 박사(68세)는 “독일에서는 단 한 번도 ‘흡수통일’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며 “흡수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8월11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헨리포드바우 컨퍼런스룸에서 아산정책연구원 알럼나이와 쉬납아우프 박사와의 토론이 진행됐다. 쉬납아우프 박사는 법학을 전공한 뒤 1978년부터 2006년까지 독일 연방중앙정부의 내무부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특히 그는 동서독간 통일조약 작성 시, 내무부 국장이자 통일조약 팀장으로 서독 실무그룹을 이끌었다. 이날 토론을 위해 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까지 온 박사는 약 한 시간 동안 ‘독일 통일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말했다. 토론엔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 학과장 이은정 교수와 윤일숙 통역사, 아산정책연구원 함재봉 원장과 봉영식 박사, 서원 졸업원생 7명 및 조선일보 유라시아 자전거 원정대원 4명 등이 함께했다. 봉 박사가 진행을 맡았으며, 이은정 교수는 박사를 “통일조약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현장에서 겪은 독일통일의 산증인”이라고 소개했다. 다음은 토론에 나온 질의 응답.
-통일조약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달라.
“독일 내무부에서 주로 담당했던 업무는 공무원 차원에서의 통일조약 작성이었다. 정치인들이 이 통일조약에 따라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게끔 초안을 작성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조약이 동독의 인민회의가 서독의 헌법에 동의해 독일 연방에 가입할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통일조약은 법적이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두 나라가 화합할 수 있는 조건을 구축했다. 내무부 전 직원들은 통일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게 돼 큰 행복을 느꼈다. 우리 가족도 동서독으로 갈려 있었기 때문에 내게는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자서전에서 나는 통일조약이 상당히 잘됐다고 평가했다.”
-통일조약이 정치경제적 화합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중요하다는 결정은 정치지도자가 한 것인가. 아니면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나. 동독인민회의는 대표성이 있었는가.
“통일조약 협상은 1990년 3월 총선거 이후 시작됐다. 그 전까지는 정해진 바가 없었다. 독일연방정부 내무부 내에 실무그룹이 있었고, 동독에는 1989년 11월9일 장벽이 무너진 이후에 공산당과는 구분되는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통일조약은 정부 대 정부가 체결하고 의회에서 승인한 조약이었다. 통일조약을 요구한 주체에 대해서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 당시 서독과 동독 양측이 법적ㆍ정치적으로 어떻게 통일이 이뤄져야 하는가를 논의했다. 두 가지 방식이 가능한 것으로 떠올랐다. 첫째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전체 독일을 다시 새로운 독일로 만드는 것, 둘째는 기본법, 즉 독일 헌법 제23조에 따른 동독의 서독 가입이었다. 양쪽 독일은 쉽게 가입에 의견을 모았다. 다시 통일이 불가능해지기 전에 빠른 통일을 선택한 것이다. 지속 가능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준비작업이 필요했고, 통일조약은 그 일환이었다.”
-조약을 맺을 때 다른 나라의 압력을 받거나 의견을 수렴해야 했던 부분이 있었나.
“독일의 통일조약은 홀로서기가 아니었다. 기존의 많은 조약을 일단 연장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점은 독일은 통일 이전까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동서독 모두 완전한 주권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승전국과의 합의가 필요했고, 그 중 옛 소련과 가장 많은 조율을 했다. 서독은 나토 회원국이지만 동독은 바르샤바조약 회원국인데 그러면 소속을 어떻게 하겠나? 또 당시 EU가 통합 중이었는데 이 과정에 전체 독일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등의 내용을 주고받았다.”
-주변국을 설득할 때 어떤 것을 신경 썼나.
“양 독일은 주변국에 대항하지 않고 합의를 위해 노력했다. 무엇보다 독일 통일로 인해 군사적ㆍ경제적 두려움이 조성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또 동독정부와 서독정부 모두 해외 지도자들과 신뢰를 구축했다. 서독은 당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친했다. 영국의 대처 총리와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때까지 쌓아온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약간의 문제라는 건 어떤 것인가.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도이치마르크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다. 앞으로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도이치마르크가 평가절하되길 원했다. 영국과는 양 독일이 EU에 통합될 때 회원국들의 주권을 그대로 유지하는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취해야 하는지가 논의대상이었다. 좀 다른 얘기인데 추가로 북한에 대해 말하고 싶다.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과 대화와 협력, 합의와 약속을 통해 통일 한국을 위한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의 경우 1989년 동독의 기존 정부가 무너지고 1990년 3월18일 새로운 인민회의와 동독정부가 구성되면서 새롭게 대표가 된 사람들과는 말이 통했다.”
-동독에 비해 서독정부의 여성정책은 여성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통일조약에는 여성문제가 얼마나 반영됐나.
“가족까지 확대해서 가족과 여성의 권리에 대해 설명하겠다. 서독보다 동독 여성의 근로환경이 더 좋다는 것을 당시의 모두가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탁아시설, 육아분담 등이 그랬다. 그러나 동독 여성의 근로환경이 좋았던 데엔 근본적으로 이념적 이유가 있었다. 동독의 여성정책은 근로환경개선이 주목적이 아니라 되도록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이념 교육을 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구체적인 항목을 정하는 대신 남녀평등을 추진하는 것은 전체 입법자들의 책임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통일조약 31조에는 ‘전체 독일 입법자들은 남녀평등을 계속해서 추진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 있다. 여성과 가족관련 조항들을 실천하는 것은 전체 독일의 입법기구이고, 그들이 풀어야 하는 과제라고 동서독이 합의를 한 거다. 여성가족부분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동독 낙태법 수용 여부였다.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라 이미 서명이 끝나 조약을 체결한 후에도 추가조항을 만들 정도로 고민을 많이 했다. 의견대립도 컸다. 결국 앞서 언급한 조항처럼 전체 독일의 입법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것을 시작해야 한다는 식으로 실험적인 조항을 넣었다.”
-통일조약을 작성할 때 언제쯤 진정한 통일이 될 거라고 예상했나.
“우리는 통일조약은 단순히 국가 성립을 위한 정부 대 정부 간의 협약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진정한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리란 걸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동독과 서독이 경제사회면에서 비슷한 수준이 되려면 한 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년이면 통일 25년이 되는데, 내가 생각한 기간과 비슷하게 가고 있다.”
-흡수통일이라고 말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독일 통일과 관련해 흡수통일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괜찮나.
“절대 안 된다. 독일에서는 한 번도 흡수통일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처음부터 한국에서 가입통일을 흡수통일로 번역한 것이 잘못이다. 법정치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흡수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기본법 23조에 따른 통일조약을 체결하는데 있어서 동독과 서독은 절대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물론 쌍방이 정치ㆍ경제ㆍ법적 측면에서 같은 조건이 아니라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양 국가가 합쳐지는가에 대해 양쪽의 합의가 있었다. 경제제도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자유민주주의질서를 어떤 식으로 동독에 소개해야 하는가 등을 사전에 함께 논의했다. 서독에서 동독을 인수 합병한 것이 아니다. 동독 시민들은 시위를 통해 더 이상 이런 독재정권은 싫고 우리는 잘 사는 서독처럼 되고 싶다는 것을 표현했으며, 서독연방에의 가입을 결정한 것은 동독의 자유총선에 의해 선출된 동독최고인민회의였다.”
-통일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갈등은 무엇이었나.
“국내외 정치적 상황이 매번 다르기 때문에 그 때 그 때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재평가해야 한다. 왜 그런 요구를 해올까, 요구의 배경이 뭘까 의구심이 일었던 때는 있었다.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이상하게 중요도를 갖게 되기도 했다. 낙태를 다시 예로 들면, 전체 독일에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동독의 규정을 적용하느냐, 보수적인 서독의 규정을 적용하느냐, 이를 꼭 통일조약에 넣어야만 하느냐를 놓고 고민했다. 나중에 통일 독일이 들어서면 그 후에 입법자들이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토지 소유권 재분배도 큰 문제였다. 분단 전 동독의 땅을 소유했던 서독인들은 자신의 땅을 돌려받으려 했고 그 땅에 살고 있던 동독 사람들은 동독에서 이미 이루어진 토지개혁을 건들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 문제 때문에 통일조약이 실패할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서독 측 사람들이 절대로 토지개혁을 인정할 수 없다면 사실상 통일을 할 수가 없고, 땅을 돌려받을 기회를 완전히 잃게 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결국 통일 독일의 입법자들이 법규를 만들게끔 했고, 나중에는 원래 토지주인이 일정한 조건으로 신청서를 내면 재구입 우선권을 주는 것으로 해결했다.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고 이런 형식적ㆍ법적 문제로 전체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되는가, 우리의 통일이 실패해도 되는가를 자문했다.”
정리=권은율 편집실 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