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미국 현지시각), 바이든 행정부는 새로운 대북정책 방향의 윤곽을 발표하였다. 트럼프 행정부의 ‘일괄타결’(grand bargain)도,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도 아닌, 탄력적이고 실용적인 대북정책을 구사하겠다는 것이 현재까지 발표된 바이든 행정부 대북정책의 복안이다. 현재로서는 전임 양대 행정부를 절충한 정책을 펼 것이라는 것이 전반적 예상이지만,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여전히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오바마 행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역시 대내외적 정책추진 여건, 북한의 반응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나타난 북한의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다. 북한은 5월 2일자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 권정근의 담화를 통해 북한의 핵개발을 미국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serious threat)으로 규정한 바이든 대통령의 의회 연설(4월 28일자)을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북한내 ‘코로나19’ 방역 관련 인권 유린 문제를 지적한 미국 국무부 대변인 논평에 대해서도 이를 ‘정치적 도발’이라고 규정하였다.1 북한은 당분간 미국의 대북정책 방향에 대해 절연(insulation), 버티기(muddling-through), 맞춤형 시위(tailored demonstration)의 세 키워드 하에서 대응해 나갈 것으로 판단된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떠한 방향성을 지닐 것인가는 이에 대한 한국의 공조 여부에 의해서도 결정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 이슈브리프는 바이든 행정부 대북정책의 주요 내용을 전망하고, 이에 대한 북한의 대응을 예측하는 한편, 우리 한국이 어떠한 대미/대북정책 방향을 구사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보려 한다.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대북정책 방향
1) 전임 행정부들의 교훈 반영
미 백악관이 젠 샤키(Jen Psaki) 대변인 명의의 언론 브리핑을 통해 밝힌 대북정책 방향은 매우 간결했다. 그녀는 과거 정부의 교훈들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정책검토를 완료하였다고 발표하였고, 미 국무부도 대북정책 검토 완료를 확인한 바 있다. 샤키 대변인은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가 여전히 미국의 대북정책 목표라고 언급하였으며, 일괄타결이나 전략적 인내 어느 한 쪽이 아니라, 잘 조율된 실용적 접근(calibrated pragmatic approach)을 요구한다고 언급하였다.2 아직 총론적인 성격 이외에 각론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대북정책의 세부적인 접근 방향에 대해서도 백악관 내에서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이 중론이다. 전반적인 예상은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과 비핵화를 위한 협상을 재개할 것이지만, 일거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단계적인 접근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 모아지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오바마 행정부처럼 ‘전략적 인내’에 따라 북한과 단절하고 체제 전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트럼프 행정부의 ‘일괄타결’ 접근과 같이 북한 핵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을 것이다. 특히, 트럼프 시대처럼 ‘탑다운’ 접근법을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지는 않으며, 실무협상을 통해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확인하는 일이 먼저라는 인식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2020년 10월 22일 가진 대선 토론회에서 바이든 당시 후보는 “김정은이 핵능력을 감축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럴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3 대통령 취임 이후인 2021년 1월 이후에도 이러한 방침은 유지되고 있다. 미국은 2월 이후 북한과의 외교적 접촉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정상간의 단기간 내 회동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었다. 2021년 3월 29일, 바이든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것이냐는 『로이터』 통신의 질문에 대해 샤키 백악관 대변인은 바이든 대통령이 “그럴 생각이 없을 것”(that is not his intention)이라고 응답하였다.4
쟁점별로 살펴볼 때,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바이든 행정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지만, 일단은 지속적인 확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역시 전임 두 행정부의 접근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2012년 북한이 『2.29 합의』를 어긴 이후 북한이 핵포기 의사가 없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따라 북한과의 협상 대신 제재와 정보의 지속 유입을 통한 북한의 체제변환을 기다리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5 반면, 트럼프 행정부는 김정은이 경우에 따라서는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보고, 그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대신 일괄타결에 의한 핵 포기가 가능하다는 접근을 취하였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지향한 ‘일괄타결’이 북한과의 타협만을 상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강도 높은 대북제재가 북한을 대화로 끌어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밥 우드워드의 『격노』(Rage)나 존 볼튼의 2018년 6월 인터뷰에서도 나타나 난 바와 같이, 협상 이외에도 군사적 조치 등의 수단 등을 통해 김정은과 직접 소통함으로써 북한 핵문제를 단기에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듯하다.6 트럼프 대통령은 이러한 인식에 따라 2018년 6월 12일의 싱가포르 합의문에 서명하였고, 이를 통해 북한은 비핵화 조치를, 미국은 미북 관계개선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의 협력을 약속하였다.7 바이든 행정부의 경우 여전히 북한의 자발적 비핵화 의지에 부정적이면서도 향후 조건의 변화에 따라서는 점진적이라도 비핵화 진전이 가능하다는 시각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쟁점은 그렇다면 어떠한 속도와 방법으로 북한 비핵화를 달성할 것인가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경우 ‘전략적 인내’에 따라 북한과의 핵협상에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동시에 군사적 옵션의 사용 가능성도 그 위험성을 고려하여 검토하지 않았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경우 2017년의 “화염과 분노”(Fire & Fury)나 “코피”(bloody nose) 작전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협상에 의한 핵문제 해결 이외에도 군사적 옵션을 검토하였고, 2018년 김정은과의 정상회담 이후에도 군사적 옵션 선택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8 2019년 12월에 들어 풍계리 핵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발사실험장을 재가동할 징후를 보이자,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이 적대적 행동을 취할 경우 거의 전부를 잃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하였다.9 바이든 행정부의 경우 외교에 무게를 두는 속성상 군사적 옵션을 사용할 가능성은 크기 않으며, 외교를 통해 우선 실무선에서 먼저 문제를 풀어나가려 할 것이다. 이 경우 실무선에서의 일괄타결을 기대하기 힘든 만큼, 우선은 북한 핵이 미 본토에 주는 위협을 차단하고 이후의 상황진전에 따라 더 큰 목표(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하는 방향이 불가피할 것이다.
마지막 쟁점은 북한에 대해 무엇을 보장하거나 제공할 것인가이다. 싱가포르에서 합의된 (1) 미북 관계개선, (2) 한반도 평화체제, (3) 북한 비핵화를 위한 노력의 세 가지를 중심으로 판단해 볼 때, 미국이 취해야 할 조치는 미북 관계개선상의 조치와 북한의 “체제안전보장 “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를 채택하면서 비핵화 관련 북한의 중대한 입장변화가 없는 한 미북 관계개선 자체를 검토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별도의 체제안전 보장 조치 역시 제시하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미 연합훈련의 연기 및 축소를 제시하고, 일부 제재의 유예 등을 카드로 검토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어떠한 조치를 취할지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열려있으며, 이는 북한의 태도, 한국의 협조 여부, 대내외적 여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다만, 북한과의 대화를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대북제재와 인권압박을 지속할 가능성은 크다. 북한이 대북제재에 의해 타격을 받고 있음이 확인된 만큼, 향후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여 대북제재를 완화하더라도 2019년의 스톡홀름 미북 실무협의에서 제기된 것 이상(일부 제재의 완화 혹은 유예)의 파격적인 제재 해제를 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트럼프 시대에는 별 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압박은 오히려 가중될 수 있다. 이미 유럽연합(EU)이 2020년 말부터 인권 문제에 대해 미국과 공조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2021년 3월에는 북한내 인권유린 기관과 개인에 대한 제재 조치를 발표하였다.10 미중간 전략경쟁이 가치전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만을 인권 문제에 대한 예외로 두기도 어려울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입장에서 북한 인권에 대한 적극적 거론은 대북 압력수단인 동시에 북한의 반발로 인한 협상 파국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그 수위 조절 여부가 주목된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인권 문제 거론은 대북제재와 함께 중요한 ‘체제안전“의 훼손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에 강력히 반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북한은 5월 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 대해 인권 문제의 거론이 ”전면대결 준비신호“라고 비판하면서 북한에게 있어 “인권은 곧 국권”이라고 단언하였다.11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방향 비교>
2) 절묘한 절충인가, 어정쩡한 타협인가?
얼핏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오바마 행정부 대북정책과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의 장점만을 결합하는 절충의 미학을 실현하려는 듯이 보인다. 문제는 북한에 대해 조기에 너무 큰 양보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뢰성 있는 북한 비핵화를 이끌어내는 묘수를 이전 행정부라고 고민하지 않았겠는가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결국 북한의 거듭된 약속 위반으로 인해 정상적인 협상의 진행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서 나온 것이고, 트럼프 행정부 역시 “일괄타결”만을 하지는 않았으며, 일종의 “스몰딜” 역시 염두에 두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이 새로운 것은 아니고, 단계적 접근은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도 시도되었던 것이라고 지적한 Alex Wong의 발언은 관념적인 계획과 실질적 협상 사이의 괴리를 잘 보여준다.12
북한의 핵능력은 오바마 행정부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되었으며, 2018년의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이후 핵과 장거리 미사일에 대한 모라토리엄은 유지되고 있지만, 이것이 북한의 핵무기 생산의 중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북한은 핵능력에 대한 증대된 자신감으로 인해 좀처럼 핵개발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핵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감당하기 힘든 대가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13
해체되어야 할 북한 핵능력이 더욱 확대되고 증강되었으며 협상과정 역시 상당한 시일이 필요한 만큼, 바이든 행정부가 일괄타결보다는 단계적 접근전략을 채택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생각된다. 과거의 경험을 되돌아볼 때, 북한이 이러한 장기적 과정을 활용하여 의제분할 전술(salami tactic)을 활용하려 할 가능성이 크고, 북한의 약속위반에 따라 언제라도 비핵화 과정은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2005년의 『9.19 공동성명』에서 북한이 모든 핵프로그램의 폐기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질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이를 반증한다. 설사 협상을 통해 다시 북한이 비핵화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북한을 구속력 있는 합의의 틀에 묶어 는가의 어려운 과제를 바이든 행정부는 해결해 나가야 한다.
단계적 접근이 지니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결국 장기적 북한 비핵화를 지향하는 협상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하거나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워싱턴 내에서는 북한이 이미 일정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즉,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freezing) 수준에서 억제하고 북한이 실질적 조치를 취할 경우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14 원래 이러한 주장은 미국 민주당 성향의 학자나 전문가들 중에서도 주로 군축론을 옹호하는 측들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북한이 2021년에 들어서도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발사를 통해 꾸준히 핵투발 능력을 시위하면서 일부 안보전문가들 역시 이에 동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단계적 접근은 어떠한 방향으로든 북한의 핵능력을 기정사실화하고 북한을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하게 된다는 딜레마가 있다.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지위가 국제적으로 등록되거나 라이선스를 받는 것은 아닌 만큼, 핵무기를 보유하고도 북한이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오히려 다른 국가들과의 일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들의 핵능력이 상당기간 해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면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용인되는 것이다. 단계적 접근은 북한 핵과 미사일 능력의 고도화가 상당히 빨리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미 본토와 비확산 체제가 흔들리는 것을 우선 저지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체제 생존의 수단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단번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단계적으로 북한의 핵능력을 해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비핵화를 달성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은 완전한 북한 비핵화를 최종 단계로 설정하되, 우선 “영변+α의 동결 → 부분 신고 → 제한적 사찰 및 검증”을 거친 후에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확약”이라는 절차를 밟고, 미국은 이에 상응하여 몇 가지 인센티브(제재 완화, 한미 연합훈련 축소, 미북 관계개선 조치 등)를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단계에서 (1)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비해 자칫 과도한 인센티브가 부여될 경우, (2) 혹은 북한이 과정의 중간 중간에서 협상 고착을 유도하고 핵능력의 부분적 해체마저도 실행하지 않을 경우, (3) 이를 통해 북한이 동결된 수준의 핵무기(50여개 내외)를 중기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방치될 경우 북한은 어떤 경우든 국제사회에서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식될 것이다. 북한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상징적인 비핵화 수준에서 더 많은 제재 해제를 얻어내는 한편, 자신들의 핵능력이 장기적으로 유지되는 결과를 창출하려 할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실용적 접근이 자칫 어정쩡한 타협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핵능력이 상당기간 유지되면서도 오히려 기존의 국제제재는 완화·해제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국제비확산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결과가 된다. 국제적 약속이나 규범을 훼손하고도 일시적인 제재만 견디면 된다는 잘못된 교훈이 잠재적 핵개발국들을 고무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재완화가 일단 실행되면 강력한 제재망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지며, 이는 협상과정에서 북한의 약속 불이행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북한을 협상에 다시 끌어들이지만, 과도한 인센티브를 제공하지는 않아야 하는 어려운 방정식을 풀어나가야 한다.
3)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국내의 희망적 사고
한국의 입장에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북한과 협상을 재개하지만 급속한 비핵화를 기대하지는 않으며, 북한의 조치에 상응하여 대북제재 완화나 해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하는 방향으로 나타날 경우, 남북한 관계의 여건은 어떻게 변화될 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방향이 결국은 미북 핵협상의 조기 재개와 한반도 긴장완화, 더 나아가서는 남북대화의 돌파구 마련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4월 28일의 기자간담회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비핵화”를 추구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는 북한도 요구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15
5월 5일 런던에서 열린 G-7 외교개발장관 회의 공동성명을 통해 기존의 CVID 대신 CVIA(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Abandonment)란 표현이 나온 것에 대해서도 미국이 북한에게 더욱 양보적인 정책을 취하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등장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16 공동성명을 통해 G7 외무장관들은 “북한의 모든 불법적인 대량살상무기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포기라는 목표를 유지한다”고 천명하였다.17 일부에서는 ‘포기’라는 단어가 ‘해체’(dismantlement)나 ‘비핵화’(denuclearization)에 비해 북한의 자발적 의사를 존중하는 뉘앙스가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G7국가들이 북한에 대해 조속한 조치를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정책의 변화로 보기는 무리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조기 제재 완화·해제를 할 경우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의 재개가 상대적으로 쉬워질 수는 있다. 그러나, 이미 북한은 2019년 이후 남북한 관계 전반에 있어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수시로 강조해왔으며, 남북경제협력 역시 우리의 지원보다는 자신들의 ‘시혜’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해왔다.18 오히려 미국과의 직접 협상 여건이 마련되면 북한은 한국의 입지나 역할을 평가절하하고 한국에 대해서만 선별적인 공세적 발언이나 도발을 선택하게 될 위험이 있다. 더욱이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는 대신 미국 본토를 위협할 능력만을 제거하려 한다면, 이는 한국에게는 상당한 안보상의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북한의 예상 대응전략
1) 절연(insulation)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방향에 대해 북한 역시 나름의 손익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와의 게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북한이 가장 먼저 택할 수 있는 책략은 자신들이 대화에 조급해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고립’(isolation)은 북한외교의 특징 중 하나였다. 김정은은 외부의 결정에 의해 북한이 수세적으로 고립되는 단계를 넘어 적극적인 차단 혹은 ‘절연’을 통해 자신들의 협상입지를 높이려 할 것이다. 2020년의 ‘코로나19’ 국면에서 불가피하게 외부와의 절연을 선택했던 경험을 활용하여 북한이 미국과의 타협 없이도 충분히 생존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 할 것이다. 1월의 8차 노동당대회를 통하여 북한이 제2의 핵·경제 병진정책을 채택하고 자력갱생을 강조하며, 미국에 대해 “강 대 강”의 대응방침을 밝힌 것 역시 의도적인 건재의 과시를 위한 제스처로 볼 수 있다.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인 최선희는 지난 3월 18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를 통해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이 철회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접촉이나 대화도 무의미하며, 앞으로도 조건의 변화가 없는 한 미국의 접촉 시도를 무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2월부터 북한과의 외교적 접촉을 시도했다고 확인한 것에 대한 북한 나름의 응답이었다.19 그 이틀 전인 3월 16일에는 김여정이 담화를 통해 한·미 연합훈련을 맹비난하였는데, 이는 주로 한국정부를 겨냥한 공세의 차원이 강하지만, 연합훈련과 같은 ‘적대시 정책’이 지속되는 한 미국과의 협상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한 대미 메시지의 성격도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20 남북한 관계와 대미 협상에 대한 의도적 절연을 통해 북한은 미국이 대폭 양보된 카드를 가지고 협상에 임하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북한은 절연이 한국 내의 남북협력 우선론이나 미국 내의 군축협상론의 논리를 강화시킬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절연의 예외에 속하는 국가들도 있는데,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 및 기타 사회주의권 국가들과는 ‘코로나19’ 방역이 위협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관계를 강화해나가려 할 것이다. 특히, 중국은 북한이 대미·대남전략을 구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후원세력이자 대북제재를 견디는 최후의 안전판으로 삼으려 하는 대상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미·중 전략경쟁 하에서 북한의 존재는 유용한 전략적 카드가 될 수 있다. 북한은 2021년이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 원조조약』 70주년이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조약의 체결일인 7월 11일을 전후하여 중국의 대북지원 능력과 북중 결속관계를 과시하는 움직임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2) 버티기(muddling through)
북한이 미국과 한국 정부로부터 이끌어내려 하는 것은 초조감이다. 북한은 여전히 건재하고 제재 등의 압력으로 인해 전혀 타격 받지 않으며,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북한의 핵능력은 더욱 증대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려면 과장된 표정관리가 필요하다. 이미 북한은 2020년 10월 10일의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행사와 2021년 1월의 8차 노동당 대회를 통해 대북제재가 그들의 경제에 상당한 압박을 주고 있다는 점을 김정은의 발언을 통해 인정하였다. 북한이 김정은 시대 들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이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는 점은 대북제재와 코로나 상황이 북한 정권과 체제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발전’에는 적지 않은 장애요인이 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김정은이 자신의 중요한 업적으로 부각해 온 것이 주민 생활의 향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북한의 정치·경제적 안정을 위해서는 ‘생존’ 이상의 성과가 필요하다.
이미 각종 수치를 통해 북한 경제의 이상신호들이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21, 이를 무한정 감추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김정은이 북한 경제가 당면한 어려움들을 솔직하게 인정한 것 역시 과거와는 달리 정보의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한 북한의 현실을 반영한 조치라 할 수 있다. 대신, 경제적 어려움이 북한 주민들의 좌절과 불만을 누적시켜 정권 및 체제를 위협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김정은은 세 가지의 대응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는 어려운 경제상황 하에서도 김정은이 주민생활 향상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또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을 주민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다. 북한은 2020년 하반기에 『위인과 강국시대』라는 선전자료집과 『위대한 인민사랑의 2020년』이라는 화보집을 편찬했는데, 여기에는 김정은 시대에 들어 변화하기 시작한 주민들의 생활상과 김정은의 북한 주민들에 대한 애정이 공통적으로 강조되어 있다.22 둘째는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국제적 위상이 파격적으로 격상되었다는 위안감을 주민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미 김정은은 2016년의 7차 노동당 대회 총화보고에서 북한을 미국과 맞상대할 수 있는 “동방의 핵대국”으로 지칭하였으며, 2017년 발간된 『조선문제는 왜 해결되지 않는가』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조미 핵대결전”으로 묘사하였다.23 세번째는 현 상황이 어렵지만 개선의 기미가 있으며, 현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내부적인 결속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 4월 8일 개최된 노동당 제6차 세포비서대회 폐막식에서 “제2 고난의 행군”을 선언했는데, 이는 1990년대 중반과 같은 고난의 행군이 불가피함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민 생활 향상을 위한 당간부 및 중견 엘리트들의 사상무장을 강조하였다. 2021년 상반기 출판된 『새 승리를 향하여』에서도 김정은은 북한식 사회주의 건설을 비전을 주민들에게 설파하고 있다.24
버티기의 목적은 북한이 조속한 비핵화와 같은 선택을 강요받기 이전에 한국과 미국 내에서 제재무용론과 북한 만능론이 대세를 이루게 만드는 것이다. 버티기를 통하여 북한은 조기에 제재의 포괄적인 해제를 이끌어내는 한편, 미국의 대한 안보공약의 약화, 그리고 미북 관계개선에서의 진전된 조치(연락사무소 개설 등)를 이끌어내는 한편, 이를 다시 버티기의 자산으로 활용할 것이다. 따라서 2021년내에 북한이 건재하다는 인상을 외부에 얼마만큼 각인시킬 수 있는가가 버티기 책략의 관건이다.
3) 맞춤형 능력시위(tailored demonstration)
북핵 협상에 있어서 미국의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북한이 각종 제약에도 불구하고 핵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강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직접적인 도발이나 선을 넘은 능력 시위는 오히려 미국의 강경노선으로의 선회와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 논리 고갈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 따라서, 김정은으로서는 미국에 대해 북한의 핵능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자신들이 먼저 협상을 깨뜨렸다는 국제적 비난은 회피하려 할 것이다. 김정은이 8차 노동당 대회 총화보고를 통해 핵능력의 지속적 발전과 한반도를 겨냥한 핵전력의 증강을 선언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맞춤형 능력시위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선언적인 조치만으로는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판단 하에서 실질적인 무력시위도 곁들여야 했으며, 이것이 3월의 순항미사일 및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할 때, 북한은 당분간은 핵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의 모라토리엄은 유지한 가운데 자신들의 핵능력을 시위할 수 있는 여타의 시위를 검토할 수 있다. 또 다른 단거리 미사일의 발사실험, 일부 신형 단거리탄도미사일의 실전배치 징후 노출, ‘북극성-4형’ 등의 SLBM 발사 실험, SLBM 탑재가 가능한 신형 잠수함의 진수식 등이 이에 속한다. 다만, 한국에 대한 도발에 대해서는 별 다른 부담을 느끼고 있지 않으므로 NLL의 침범이나 군사분계선 일대에서의 무력 증강 등의 시위는 언제라도 선택할 수 있다.
다만, 미북 협상이 계속 지연될 경우 북한 역시 이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주민들의 불만을 우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정 시간이 지나서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을 재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에도 북한은 명분 축적을 위해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교감 하에 북한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대북제재의 즉각 해제 등을 주장한 이후 미국이 이에 대해 별 다른 호응을 하지 않을 경우, 2020년 하반기에 적극적 능력시위로 선회하는 책략을 택할 것으로 전망된다.
향후의 상황전개 전망 및 우리의 대응방향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단계적 접근을 채택할 것을 시사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조기 대북협상으로 이어지기에는 한계가 있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자신들의 융통성 있는 접근이 자칫 어정쩡한 타협으로 귀결될 위험성을 알고 있을 것이며,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접근 역시 양보 우선 정책에 불과했다는 국내의 비난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 핵능력의 빠른 고도화에 주목하면서도 이것이 최우선적으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인식은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며, 대북정책 윤곽을 발표했으면서도 협상을 총괄할 대북정책특별대표 인선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이 이를 암시한다. 한미 연합훈련의 지속 유예 등과 같은 조치는 동맹의 재강화라는 자신의 약속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며, 미국의 여타 동맹국들에 대해서도 안보공약의 신뢰성을 저하시킬 것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핵을 잠정적으로라도 용인하는 자세를 취할 경우, 국제비확산체제의 유지를 보장할 수 없으며, 이란과의 핵협상에서도 수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바이든 행정부의 현재까지의 대북 접근은 북한이 지나치게 큰 도발적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차원에서 외교적 접촉을 지속하지만, 조속한 협상 재개에 매달리지는 않는 방향으로 나타날 전망이다. 즉, 현 수준의 제재를 유지하고 인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함으로써 북한이 얼마만큼 입장을 변화할 여지가 있는지를 먼저 타진한 이후에 실질적 협상에 나서려 할 것이다. 북한 역시 현재로서는 미국과의 기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를 바라고 있으므로, 바이든 행정부가 제재의 일부 완화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협상 재개를 제안하더라도 이에 응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1)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제재와 인권 문제 거론이 별다른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북한의 핵능력이 예상외로 급속히 발전되고 있다고 판단하거나, (2) 북한이 제재와 인권 문제로 인해 오래 버티기가 힘들다는 계산이 들 때까지 서로의 탐색전은 계속될 것이며, 2021년 하반기가 되어서도 실질적인 대화는 재개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현상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결국 어느 한쪽이 현재와 같은 상황을 더 이상 감내하기 힘들다는 계산이 섰을 때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향후 상황전개는 크게 세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번째는 미북 상호간 기싸움의 지속의 경우이다. 미북간의 협상시도가 있더라도 중대한 타결보다는 현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차원이 될 것이며, 북한은 핵실험 재개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같은 중대 도발보다는 한국을 겨냥한 도발로 긴장을 조성하려 할 것이다.
두번째는 미국이 결국 선제 양보를 택하는 경우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더 이상 지켜보면 위험하다는 판단 하에 핵 동결을 대가로 트럼프 행정부에 비해 더 큰 제재 완화를 제안하고, 한미 연합훈련 지속 축소 및 연기, 미북 외교관계 개선 조치 등의 조치를 추진하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의 핵보유가 기정사실화되며, 핵과 미사일 실험 재개는 없겠지만, 한국에 대한 도발은 지속될 수 있다.
마지막의 경우는 북한의 내구력 소진 및 정책노선 변화이다. 북한이 경제적 곤궁과 사회적 불만에 직면, 적절한 명분을 제공받는 선에서 기존보다 더 확실한 비핵화 조치(포괄적 핵시설 폐쇄 조치, 엄밀한 국제적 검증 수용, 일부 핵물질 조기 반출 등)를 취하는 경우이다. 물론, 김정은으로서는 핵무기가 가지는 의미가 대미 레버리지에 못지 않게 내부적인 수령 독재 유지에 있으므로, 여간해서는 이러한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설사 북한이 이러한 노선을 택한다고 해도 일방적인 핵포기가 아닌, 적절한 명분의 제공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게는 북한의 변화가 최선이지만, 미국이 대북양보를 택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북한 문제 이외에도 해결해야 할 다양한 대외정책 이슈들이 있으며, 제재와 인권 이외에는 북한에게 변화를 강제할 여타의 자산(군사적 옵션)도 마땅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핵무기가 본토를 위협하는 최악의 사태를 방지해야 한다는 불가피성을 내세울 수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이 맺은 싱가포르 합의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명분도 제시할 수 있다. 이미 바이든 행정부는 2월 이후 북한과의 외교적 접촉을 시도했으며, 북한이 3월 21일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했을 때에도 이에 대해 경고했지만 외교적 해법이 열려 있다는 입장(I’m also prepared for some form of diplomacy)을 취했다.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가 UN 안보리 결의안의 위반이라는 점을 지적했으면서도 이 문제를 UN안보리에 회부하여 제재를 격상하는 대신 UN안보리 산하의 대북제재위원회에 회부하는 대응을 취하는 데 그쳤다.25 북한 핵 문제에 대해 한미간의 이견이 발생하는 듯한 인상을 차단하려는 배려로 생각되지만,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정책 발표시 기존에 사용하던 “북한 비핵화”(denuclearization of North Korea)라는 표현 대신 “한반도 비핵화”(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라는 표현을 쓴 것 역시 향후의 양보를 위한 포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워싱턴 내에 제재무용론과 대북 군축협상론이 더욱 거세어질 경우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의 핵 동결 수준에서 협상을 시작하고, 대북제재의 조기 완화·해제를 택하며, 최종적 비핵화라는 목표를 명시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미국이 선제 양보를 선택할 경우 남북대화나 교류협력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북한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남북협력이 될 것이다.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게 된 북한이 한국을 대등한 파트너로 대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양보가 제재해제에만 국한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한국 정부가 남북대화에만 집착하여 제재가 북한 변화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거나 미국의 선제 양보를 권유하게 될 경우, 미국은 한국의 대북정책 파트너로서의 신뢰성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며, 양보의 카드로 한미 동맹과 관련된 쟁점을 과감히 선택할 수도 있다. 워싱턴은 북한의 핵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지겠지만, 한국은 ‘평화’의 이름 하에서 사실상 핵위협에 그대로 노출되어 북한의 선의만을 기대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설사 미국이 중대한 양보를 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핵기술이 고도화된 현 상태에서 지루한 눈치보기가 지속되는 것 자체가 한국의 안보에는 도움이 되지 못 한다. 미국의 양보가 극히 상징적인 것에 불과할 경우에도 미북 협상이 재개되는 것 자체를 북한이 핵보유국 기정사실화의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을 비핵화 협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한미의 공조와 공통의 압력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북한이 진정한 비핵화 조치를 약속하지 않는 한 기존 제재를 격상하지는 않더라도 제재 이행을 강화하고 제재 회피 행위에 대한 감시 및 적발 역시 확대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여야 미국이 자신감 있는 대북정책을 전개할 수 있다. 북한을 압박하는 카드로써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주위 환기 역시 필요하다. 특히, ‘종전선언’과 같이 비핵화보다는 한반도 평화체제에 집착한 접근을 취하거나, 동맹 차원에서 연합 훈련의 연기나 축소를 한국 나서서 주장하는 등 미국의 선제 양보를 촉구하는 움직임은 자제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노력이 있어야 미국 내에서도 북한 핵능력의 기정사실화와 대북 군축협상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위축시킬 수 있다.
북한의 진정성 있는 비핵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한미 연합대비태세의 증강도 병행되어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능력 해체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으며, 단계적 비핵화가 불가피하다면 그 기간은 더욱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미 동맹 차원에서 그동안 수사적으로만 표명되어 왔던 미국의 확장억제를 구체화하는 조치 역시 조속히 추진되어야 한다. 단계적 비핵화가 불가피하다면 상당기간 동안 북한의 핵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것이 핵무기에 대한 북한의 집착을 오히려 감소시킬 수 있다. 한미간 핵기획그룹(NPG) 구성, 핵공유 개념 실현, 미국 전술핵 재배치 등의 조치가 실제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야 북한이 핵무기를 레버리지로 사용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될 것이며, 북한의 핵능력이 존재하더라도 북한의 전략적 우월성이 상쇄될 수 있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바이든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 내용에 대해서는 U.S. White House, “Remarks as Prepared for Delivery by President Biden – Address to a Joint Session of Congress” (April 28, 2021)을 참조할 것.
Remarks as Prepared for Delivery by President Biden — Address to a Joint Session of Congress | The White House.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미 국무부 성명은 에드워드 프라이스(Edward Price) 미 국무부 대변인이 미국내 북한인권단체가 개최한 “북한자유주간”(North Korea Freedom Week) 행사를 맞아 북한내 인권 유린문제가 “지독하다”(egregious)고 한 데 대한 대응의 성격이었다. 프라이스 대변인의 성명에 대해서는 U.S. State Department, “On the Occasion of North Korea Freedom Week” (April 28, 2021)을 참조할 것.
On the Occasion of North Korea Freedom Week –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 2. 샤키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를 참조할 것.
https://www.whitehouse.gov/briefing-room/press-briefings/2021/04/30/press-gaggle-by-press-secretary-jen-psaki-aboard-air-force-one-en-route-philadelphia-pa/. - 3. 대선토론회에서 바이든 당시 민주당 후보가 했던 정확한 표현은 “on the condition that he would agree that he would be drawing down his nuclear capacity…”였다.
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20-10-23/biden-says-he-d-meet-kim-jong-un-only-if-nuclear-arsenal-reduced. - 4. https://www.reuters.com/article/us-usa-northkorea-biden-idUSKBN2BL2GU.
최소한 현단계, 현재와 같은 여건 하에서는 바이든 행정부는 정사회담의 효용이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스티브 비건 전 대북정책특별대표도 2020년 12월 10일 아산정책연구원에서의 공개강연에서 북한에 대한 “탑다운” 접근이 그리 효과가 없었음을 토로한 바 있다. - 5. 물론, 전략적 인내를 추진하면서 공식적으로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의 체제변환(정권교체)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5년 1월 오바마 대통령이 유튜브 인기스타들과 나눈 2015년 국정방향 관련 대화에서는 북한의 체제변환 기대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기대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It’s very hard to sustain that kind of brutal authoritarian regime in this modern world. Information ends up seeping in over time and bringing about change. That’s something that we are constantly looking for ways to accelerate…”
The YouTube Interview with President Obama – YouTube. - 6. 우드워드의 저서에서 나타난 전반적 방향은 트럼프가 단기간 내의 북핵 해결에 대해 나름 자신감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는 존 볼튼 등 그의 참모들의 인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볼튼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전 1년 내에 북한을 비핵화하는 프로그램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접근으로 표현한 ‘Grand Bargain’은 사실상 ‘단기해결’(Short-term Solution)에 가깝다. Bob Woodward, Rage (New York: Simon & Shuster, 2020).
존 볼튼 회견에 대해서는 Bolton says there’s a one-year plan for North Korea to denuclearize, stays mum on WaPo report – CNNPolitics. - 7. 미북간의 싱가포르 합의 내용에 대해서는 https://www.cnbc.com/2018/06/12/full-text-of-the-trump-kim-summit-agreement.html.
- 8. 트럼프 대통령 자신은 군사적인 대북 옵션에 대해서도 북한이 이에 쉽사리 반격하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던 듯하다. 이는 우드워드의 『격노』에서도 묘사된 바 있다. 코피 작전 당시 미국의 판단에 대해서는 Michael E. O’Hanlon and James Kirchick, “A ‘bloody nose’ attack in Korea would have lasting consequences,” Brookings Trump and Asia Watch series (February 26, 2018) 참조.
- 9. https://www.voanews.com/east-asia-pacific/trump-warns-north-koreas-kim-hostile-actions.
- 10. https://www.consilium.europa.eu/en/policies/sanctions/history-north-korea/.
- 1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대변인 담화,” 『조선중앙통신』(2021년 5월 2일). 이 성명을 통해 북한은 미국의 인권문제 제기가 “…우리의 사상과 제도를 부인하고 《인권》 을 내정간섭의 도구로, 제도전복을 위한 정치적 무기로 악용”하는 행위라고 규정함으로써 이 사안이 북한의 체제안전보장과 연관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 12. Wong은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대북정책특별부대표를 맡은 바 있으며, 『동아일보』와의 5월 7일자 인터뷰에서 이러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510/106836250/1. 물론, Wong의 발언은 전임정부 정책에 대한 일종의 방어의 성격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하의 미국이 2019년 10월 스톡홀름 미북 실무협상을 통해 북한의 일부 비핵화 조치(영변 + α)에 대한 상응카드로 일부 제재의 유예를 제안했다고 알려졌던 점을 고려하면, 트럼프 행정부 역시 일종의 ‘스몰딜’과 ‘일부 단계적 해결’을 완전 배제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 13. 아산정책연구원과 미 RAND연구소가 2020년~2021년간 시행한 북한의 핵위협 대응에 대한 공동연구에서도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오히려, 지금의 추세대로 북한이 핵개발을 지속할 경우 2027년 북한의 핵탄두 수가 200여개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Bruce W. Bennett, Kang Choi, et al, Countering the Risks of North Korean Nuclear Weapons, Perspective (March 2021).
- 14. 이에 대해서는 Josh Rogin, “Biden’s North Korea strategy: Hurru up and wait,” The Washington Post (May 5, 2021); Robert Einhorn, “The key choices now facing the Biden administration on North Korea,” 38 North (March 30, 2021); Eric Brewer and Sue Mi Terry, “It Is Time for a Realistic Bargain With North Korea: Denuclearization Is Probably Out of Reach for Now—but It Might Be Possible to Reduce the Nuclear Threat,” Foreign Affairs (March 25, 2021); Van Jackson, “Risk Realism: The Arms Control Endgame for North Korea Policy,” Center for American Security Research (September 24, 2019); 김카니, “미 전문가들 “북한 핵동결은 첫단계…목표는 완전한 비핵화” VOA News (2019. 7.3) 등을 참조할 것. 마이클 그린은 이러한 목소리들이 결국 북한의 핵보유를 일단 용인하는 가운데 미 본토에 대한 핵위협을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는 정책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전망하였다. 마이클 그린, “미국이 북핵보유 일단 용인할 수도,” 『중앙일보』 (2021년 4월 9일).
- 15. “이인영 장관, [美 바이든, 한반도 비핵화 ‘단계적 접근’할 것],” 『매일경제』(2021년 4월 29일).
- 16. “CVID·CD 이어 CVIA···’핵폐기 vs 핵포기’ 바이든 선택은?” 『중앙일보』(2021년 4월 29일).
- 17. G-7 외교개발장관 회의 공동성명에 대해서는 “G7 Foreign and Development Ministers’ Meeting, May 2021: communiqué” (May 5, 2021) 참조.https://www.gov.uk/government/publications/g7-foreign-and-development-ministers-meeting-may-2021-communique.
- 18. 차두현, “북한의 남북관계 단절 선언과 그 파장,” 아산정책연구원 『이슈브리프』, 2020-19(June 17, 2020).
- 19. “北최선희, 美 접촉시도 확인…[적대정책 철회 안하면 계속 무시]” 『연합뉴스』(2018년 3월 18일).
- 20. 김여정의 3월 담화에 대해서는 “김여정 [3년전 봄날 다시 안와] 한미훈련 맹비난,” 『조선일보』(2021년 3월 17일자) 참조.
- 21. 이에 대해서는 고명현, “North Korea’s New Byungjin: Nuclear Development and Economic Retrenchment,” 아산정책연구원 『이슈브리프』, 2021-09(Mar 08, 2021)을 잠조할 것.
- 22. 이에 대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국문출판사, 『위대한 인민사랑의 2020년』 (평양: 평양외국문출판사, 2020); 평양출판사, 『위인과 강국시대』(평양: 평양출판사, 2020) 참조.
- 23. 이에 대해서는 조선평양외국문출판사, 『조선문제는 왜 해결되지 않는가』 (평양: 평양외국문출판사, 2020) 참조.
- 24. 평양출판사, 『새승리를 향하여』 (평양: 평양출판사, 2021) 참조.
- 25. “Biden warns of responses if North Korea escalates, but open to diplomacy,” Reuters (March 26,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