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활동

<한-독 청년통일마당 취재 기사 시리즈 2>

레나테 홍 여사에게 듣는 통일 과정 속 동독여성

“가장 마음 아픈 일은
동독 출신 많은 여성들이
수준 맞는 일자리 못 찾은 것”

아산서원 졸업생 이정현, 조경채

‘47년 순애보적 기다림 끝의 2008년 감격적인 상봉’, 한국 언론을 통해 알려진 레나테 홍 여사에 대한 묘사다. 하지만 남편을 향한 47년이란 기다림을 단순히 햇수가 아닌 한 여성의 생애로 보면 다사다난했던 삶뿐 아닌 독일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마주하게 된다. 8월 10일, 독일 예나에서 그녀를 만났다.

 

 

강인한 동독 여성 – 그 뒤에는 사회주의 이념이 뒷받침

“힘든 시간이었지만 남편을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면서 버텨냈다.”

북한 유학생이던 홍옥근씨와 5년간의 열애 후 결혼한 지 일 년 만인 1961년. 레나테 홍 여사의 남편 홍씨는 ‘이틀 안에 귀환하라’는 북한 당국의 명령을 받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다. 예나 역에서 남편을 보내고 쓸쓸히 돌아서는 그녀에게 남은 것은 갓난아기였던 첫째 아들 현철과 뱃속의 둘째 아들 우베 뿐이었다. 그녀는 “홀로 두 아들을 키는 게 힘들었지만 남편을 다시 만났을 때 자랑스레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담담히 말한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한국에서 레나테 홍 여사는 외국인 이산가족 상봉 1호로 유명하다.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레나테 홍, 당신의 삶을 알고 싶다.

“1937년 생인 나는 2차 세계 대전도 겪었다. 종전이 됐을 때 학생이었다. 종전 이후 분단이 되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도 서독 지역을 방문하며 친척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예나 대학교에서 화학공부를 5년간 한 후 화학교사 자격을 얻어 8년간 예나 지역 중학교에서 화학 교사로 근무했다. 그 이후 성대에 이상이 생겨 70년부터 통일이 될 때까지 예나에 있는 제약회사의 인사 부서에서 일을 했다. 다행히 동독 정부의 정책 덕분에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 정부의 직접적 재정 지원은 없었으나, 당시 동독 사회는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해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환경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다. 하지만 동시에 통일 이후에 여성이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며, 매우 유감이다.”

-통일 뒤 고용 상황은 어떠했나.

“통일된 해에 내 나이는 55세였다. 동독 기업들은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과다 인력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관행을 타파하고 효율성을 높인다며 나이 많은 이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독의 기술 수준은 아주 낙후돼 있었는데 그래서 통일 뒤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 있지 못하면 영업을 할 수 없어서 많은 회사들이 문을 닫게 됐다. 내가 다니던 회사도 마찬가지여서 나도 곧 조기 퇴직 대상자가 됐다. 다행히 그때 정리 해고된 사람들은 조기 퇴직에 따른 조기 연금을 받았다. 마지막 임금의 70% 수준이었다.”

-오스텔지어 열풍 등을 보면 통일 후 사람들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통일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통일 뒤 여성들의 삶의 질이 더욱 나빠졌나.

“여성들이 일자리를 잃은 것은 사실이다. 사업주들은 여성 근로자로부터는 지불하는 월급만큼 수익이 안 나온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성이 혼자 아이를 키우면 생산 능률이 떨어지고 초과 근무가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동독 시절 여성의 근로활동이 활발했지만 동독 기업엔 여성 근로자의 절대수가 많았기 때문에 기업이 파산하면 여성 실업자가 많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제약, 화학 분야에 여성 인력들이 많았다. 이들 중 일부는 통일 후 재교육을 통해 행정직을 얻을 수 있었고, 재교육 후에도 직업을 갖지 못한 경우에는 3년간 사회봉사직에 종사하면서 저임금이나마 받을 수 있었다. 슈퍼 캐셔, 납품 업체의 저임금 직장으로 옮기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부의 보조가 충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자기 수준에 맞는 일자리를 못 찾은 여성이 많은 게 동독출신으로 가장 마음이 아팠다.”

한국의 여성주의 흐름에서 동독은 이상적인 여성 정책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통일 후 24년, 독일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러한 시각을 경계하고 있었다. 레나테 홍 여사도 통일의 최대 피해자를 뭉뚱그려 여성으로 설정할 것이 아니라 통일 이후 학력이나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찾지 못한 여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를린에 있는 동독 박물관의 홍보담당자 멜라니(43)도 같은 입장을 보였다. 동독 지역의 삶 알리기에 힘쓰고 있는 멜라니는 “일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동독의 노동력 부족으로 일자리에 내몰렸던 여성들이 있으며, 이들이 노동시장에서 방출된 것은 자신의 선택이며 자발적인 것이기에 문제될 것 없다”며 “그러나 일자리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지만 여건이 되지 않은 여성들의 처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당 지도부에서 여성 의원은 서기장 호네커의 부인 오직 한 명뿐이었으며 동독 여성들이 높은 경제활동 참가율을 보이긴 하였으나 대부분 저임금, 저 숙련의 지위가 낮은 직종에 종사했다고 지적한다. “통계 속의, 숫자에 가려진 진정한 사람들의 삶을 놓쳐선 안 된다”고 했다.

“통일, 힘들 것을 알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원했다.”

-당신이 남편과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동독과 북한, 두 국가가 사회주의 동맹국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은 남편을 만날 기회를 좁힐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통일을 원했나.

“당연하다. 많은 동독 사람들이 서독에 친인척이 있었기에 통일을 원했다. 서독 사람들이 통일을 원했을 이유이기도 하다. 분단 시에도 동서독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민족임을 잊지 않았다. 나에겐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던 친구들이 있었으며, 이들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좋았다. 동서독 간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은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독일 통일의 바탕이다.”

홍 여사는 2008년 평양을 방문할 수 있었다. 당시 두 아들에게 ‘아버지로부터 따듯한 스킨십이나 애정을 기대하지 말라’고 일렀다. 자기의 마음이기도 했을 것이다. 남편이 내성적이고 오랜 시간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짧은 상봉 동안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예나에서 찍은 부부 사진을 남편에게 건네주었는데 남편은 사진을 상봉 기간 내내 가슴에 품고 다녔다. 금발 외국 여성이 누구냐고 물으면 남편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꺼내 보여줬고 그때마다 그녀는 ‘감사하다’고 했다. 그녀는 삶을 감사로 채워온 낙천적인 동독 여성 같았다.

레나테 홍 여사의 고향, 예나와 칼 자이스

예나는 칼 자이스(Zeiss)라는 회사로도 유명하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이 광학 전문 회사는 카메라 렌즈 등을 전문 생산한다. 캐논 같은 일본의 렌즈 회사들이 보급형 렌즈에 초점을 맞추고 기술을 개발할 때에 왜곡이 적은 전문가용 렌즈에 집중, 고수익 시장을 노리고 독일 기술을 선도했다. 하지만 늘 잘 나갔던 것은 아니다. 이 회사의 역사는 구 동독 회사들이 겪은 질곡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150년 전통의 회사는 구 동독 지역인 예나에 본사를 뒀었다. 1846년 칼 자이스(Carl Zeiss)가 예나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 설립한 이 회사는 현미경 렌즈 분야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카메라의 보급과 더불어 카메라 렌즈 분야에서도 브랜드를 구축하며 승승장구했으나 2차 대전 때 나치에 조준경 등을 납품해 전범기업이 되는 수모를 겪었다. 전후 승전국들의 독일 분할 점령은 칼 자이스에도 큰 타격을 줬다. 또한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소련에게 시설과 기술을 빼앗기기도 했다.

현재 칼 자이스는 옛 영광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1986년 재 창립을 선언한 회사는 동독과 서독에 흩어져 있던 사업을 통합했으며 한국에 진출한 지도 10여년이 흘렀다. 칼 자이스는 동독 지역에서 살아남은 기업으로 귀감이 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