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활동

1,664 views

전문: 아산서원 알럼나이(졸업생)7명은 지난 8월 15일을 전후해 통일독일을 둘러봤다. 통일 20여년이 지난 지금 독일연방의 모습은 어떠한가. 출신을 둘러싼 갈등은 어느 정도 진정됐을까. 과거사는 어떻게 해결됐을까. 그런 물음들은 한반도 통일에 시사점을 제공할 포인트들이었다. 모두 합해 약 열흘간의 취재. 그 결과를 총 9개의 기사 형식의 글로 종합했다.

 

<한-독 청년통일마당 취재 기사 시리즈 2 >

아직도 진행중인 통일 희생양 동독 여성의 고통

능력 맞는 일 못구하고
대부분 저임금, 저숙련 업무
직장 구하느라 출산도 미뤄

서원 졸업생 이정현, 조경채

#사례1=‘라베무터(Rabenmutter,까마귀 엄마)’. 이 단어가 서독 출신의 ‘동독박물관’의 홍보 담당자인 멜라니(43)에겐 불쾌감을 준다. 독일에선 까마귀는 새끼를 둥지에 두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까마귀 엄마’라는 속어엔 직장 여성들이 아이를 팽개친다는 못마땅한 시선이 담겨 있다. 영어론 더 직설적이어서 ‘나쁜 엄마’로 번역된다. 멜라니는 “서독은 동독과 달리 출산 장려를 위해 ‘집에 있는 어머니’를 이상적인 어머니상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여성의 경제활동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지배적이었고 그 점은 서독 출신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유럽 내에서 가장 낮은 데서도 엿보인다. 베를린 자유대학의 안셈 라파엘 후벤파워(28)는 “직장 여성들에 한정되기보다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내팽개치는 엄마를 의미해요. 까마귀를 좋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거죠”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서독’에선 여성과 직장이 병행하기는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례2=‘무띠(Mutti)’.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 자리를 수년 째 굳게 지키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붙은 애칭이다. 단어의 뜻은 별것 아니다. 어머니를 뜻할 뿐이다. 자상하고 다정한 ‘엄마 리더십’으로 올해로 10년째 독일을 이끌고 있는 독일의 첫 동독 출신 여성 총리에 붙인 별명이라고 보면 편하겠지만 그것 만이 아니다. ‘직장에서 시련과 극복’의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어머니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동독적 관점이 짙게 배인 단어다. 직장과 여성은 옛 동독에선 불가피한 관계였다.

두 사례에서 나타나듯 옛 동독과 옛 서독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인식 차이는 컸다. 이런 간극은 서독 중심으로 통일되면서 동독 여성들에겐 굴레가 됐다. 인생 전반에 걸쳐 동독에서 배운 것은 ‘가정과 직장의 병행’인데 서독적 삶이 요구하는 현실은 그와 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통일 직후 통일의 최대 피해자는 동독여성’이란 주장이 나오는 근거가 됐다. 지난 8월 베를린에서 통일과정에서 동독 여성들이 겪은 어려움을 알아봤다. 통일조약 체결 당시 서독 측 참가자를 만나 ‘통일이 되면 이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지’를 물었고, 20대와 40대 서독 출신 여성의 생각은 어떤지, 70대의 동독 출신 여성의 생각은 또 뭔지를 들어봤다.

동독은 직장우선, 서독은 가정우선

2차 대전 직후 동ㆍ서독은 모두 인구 늘리기에 애를 썼다. 그러나 정책 방향은 달랐다. 서독은 ‘집에 있는 어머니상’을 통해 가정 양육에 초점을 뒀다. 그러나 동독에선 탁아소, 보육원 등의 시설을 늘려 여성 출산을 장려하고 육아는 정부에서 책임지는 방식으로 나갔다. 통계로 보면 동독여성의 첫 자녀 출산 평균연령이 1955년 22.8세, 1960년에 22.2세, 1970년에 21.9세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낮아지는데 이는 동독 정부의 육아 지원 상황을 반영한다.

서독에선 거꾸로 양육 시설 건립을 사회주의적 정책이란 낙인을 찍었다. 1990년 통일과정에서 내무부 국장으로 있으면서 통일 조약 작성의 실무 책임을 맡았던 크라우스-디터 쉬납아우프 박사(68세)는 “동독이 육아환경을 좋게 만든 목적은 여성의 근로환경 향상을 목표로 한 게 아니라 어린 아이를 조기에 이념 교육하려는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동독의 보육원엔 ‘단체 변기 시간(Collective Potty Break)’이란 것이 있었는데 서독은 이것도 문제 삼았다. 원아들이 배변 훈련의 일환으로 긴 변기에 모두 함께 앉아 용변을 봤는데 마지막 한 아이까지 볼 일을 마쳐야 일어날 수 있게 한 게 문제란 것이다. 냉전시대 서독이 보기에 동독 보육원은 사회주의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이 틀에 맞춰진 공간이었다.

 

2회 메인 사진

동독의 ‘단체변기시간’ 실제 사진과 모형 (베를린 동독박물관 소장)

그러나 어쨌건 동독 정부의 아이 돌보기 시스템은 엄마의 사회생활을 가능케 했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탁아소, 유치원에 맡겨졌다. 인구대비 동서독 탁아소 수를 비교해보면 ‘워킹 맘’이 가정과 일을 병행하기에 동독이 훨씬 더 좋은 환경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독 지역에서 평균적으로 80%의 아동이 탁아소에 맡겨졌다. 일부 도시지역에서는 99%까지 올라갔다. 유아원의 경우 동독 지역에서 100명의 0~3세 유아당 41개의 유아원 자리가 있었던 반면, 서독 지역에서는 유아 100명당 2명의 자리만이 있었다.

‘노동’이 인생의 본질적 가치에 해당됐던 동독에 이것은 중요했다. 인민들에겐 ‘노동해야 할 의무’도 있었지만 ‘노동할 권리’는 당연히 보장됐고 직장은 사회적 자아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 됐었다. 어머니가 동독 출신인 사라(27)는 “동독사람들에게 직장은 제2의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직장은 인간관계가 맺어지는 공간이었고 삶의 터전이었다. 직장 이동이 그렇게 잦지 않았기에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통일뒤 오히려 여성 정책 사라져

그런데 통일은 모든 것을 바닥부터 흔들었다. 그들에게 통일은 꿈의 실현은커녕 악몽의 시작이었다. 통일 후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동독엔 실업강풍이 몰아쳤다. 말 그대로 삶의 터전이 상실됐다. 동독 여성의 활동반경은 갑자기 가정으로 한정됐다.

그래도 동독 여성들은 ‘배운 바가 있어’ 서독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구직활동을 열심히 했다. ‘동독인’에 대한 차별, ‘여성’으로 갖는 어려움 같은 것을 꾹꾹 눌러가며 삶을 헤쳐나갔다. 통일 후 실업-재교육-재취업의 과정도 겪었다. 그래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통일 10년도 훌쩍 넘은 2003년까지 동독 여성의 전체 실업률은 여전히 서독 여성의 두 배를 훨씬 넘는다. 그래서 동독 출신의 사라(37세, 약국 운영)는 “동독 출신 여성들이 직장에서 쫓겨날 경우 통일된 독일이 사회보장으로 이들을 받쳐줄 수는 있었겠지만 일자리는 제공하지 못했다. 일도 선택이라는데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도 없었다”고 동독 지역의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서독에서 자랐지만 부모님이 동독 출신인 리처드(18세)는 “엄마는 늘 일자리를 찾았고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해준 엄마에게 감사하긴 하지만 바로 그래서 부담스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동독 출신 여성들은 통일과정에서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나마 동독이 우월했던 양성평등 고용에 대한 주장을 펼칠 기회도 없었다. 동독에서 회사원으로 근무하다 통일과 동시에 실업자가 된 레아(62)는 “고위 공직자들은 모두 남성이었고 이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데 급급했는데 단체들도 힘이 없어 나를 보호해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훔볼트 대학 재학 중인 레아(28)는 ‘직장과 결혼 계획’을 묻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동시에 평생 동안 직장 갖는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결혼을 늦출 수는 없었다고 했다. 몇 달 전 남자친구와 이야기해 보았지만 딱히 답을 내지는 못했다. 여성들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출산과 결혼을 기피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두 레아의 사례는 통일 직후 동독여성의 초산 연령이 급속히 늦춰지고 출산율도 하락한 이유를 설명한다. 여성들은 사회진출과 가정이라는 선택 앞에서 가정을 포기하는 사람이 늘었던 것이다. 동독의 출산율은 1989년 이후 1993년까지 64%나 감소했고 전국적으로 불임시술이 급증했다. 통일 직후 갑작스런 출산율 저하는 2차 대전 때의 감소폭을 상회한다. 육아환경도 급변해 탁아소에 아이들을 맡기기가 어려워졌다. 베를린 보건당국자료에 따르면 1989년 평균 12시간이던 동독지역 탁아소 운영시간은 통일 3년 뒤인 1992년 7시간으로 줄었다. 탁아소에 맡기는 아이들 수도 반으로 줄었다. 직장은 동독출신 여성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지금도 피해의식이란 상처로 남고 독일 사회에 대한 소속감 결여라는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통독 24년, 변화하는 독일 여성상

동독 여성과 서독 여성의 ‘바람직한 여성관’은 여전히 갈등 중이다. 최근 벌어지는 양육수당과 관련된 논쟁이 한 단면이다. 2013년 메르켈 정부는 아이를 양육하는 전업 주부 여성에게 월 100유로의 양육 수당을 지급하기로 했다. 출산 후 약 1년간 지급되는 양육 수당과 3세에 시작하는 유치원 교육 수당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정책이었으나 도입 후 전업 주부들과 직장 여성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현재 양육 수당 인상을 추진하고 있고 전업 주부들은 이러한 양육 수당 인상을 찬성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직장 여성들은 양육 수당 인상보다 이 예산을 탁아소 건설에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새로 융합된 여성상도 나타난다. 베를린 공과대학 4학년 토비아스(25세)는 “전엔 여성들이 일하려면 남편의 허가를 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그건 옛날 얘기일 뿐이다. 여성이 집에 있어야 한다면 왜 그렇게 많은 여학생들이 대학에 다니겠나”라고 했다. 동독적 모성상, 서독적 모성상의 차이를 묻자 베를린 자유대학생 미연 슐트카(26)는 “글쎄요. 지금은 정말이지 그런 구분이 무의미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서독에선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를 더 바람직하게 생각하긴 했어요. 상대적으로 동독에서는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통일 뒤에도 서독 지역에선 가정주부가 가장 일반적인 어머니상이었죠. 우리 윗세대까지만 해도 결혼하면 집에 있으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적어도 내 주변엔 그런 친구들이 거의 없어요”라고 말한다.

뮌헨의 직장인인 클라라씨는 주말엔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주중엔 전 남편에게 아이를 보낸다. 고속철인 ICE로 세 시간. 힘이 들 텐데 그는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양육권을 포기하더라도 주중엔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중년의 멜라니도 “어머니는 전업주부로 나를 키웠지만, 나는 직장에 다니고 싶다. 가정을, 아이를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겐 직장이 소중하다. 동독 지역이 근로 환경은 낮아지지만 보육 시설 같은 것이 잘 되어 있어 매력적인 부분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2013년 독일의 경제 사회 연구소(WSI)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 독일 여성의 47.5%는 시간제 일자리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는 같은 방식으로 일하는 남성의 8.5%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여성의 50%는 시간제 일자리를 택한 이유로 ‘가족을 돌보기 위해’라고 답했다. 남성은 9%였다. 이는 가족 돌봄을 여성의 역할로 여기는 서독의 현대 여성상이 독일 전체에 이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희미해져 가는 동독 여성상은 동독출신 여성이 통일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었을까.

 

◆관련 기사: 레나테 홍 여사에게 듣는 통일 과정 속 동독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