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활동

전문: 아산서원 알럼나이(졸업생)7명은 지난 8월 15일을 전후해 통일독일을 둘러봤다. 통일 20여년이 지난 지금 독일연방의 모습은 어떠한가. 출신을 둘러싼 갈등은 어느 정도 진정됐을까. 과거사는 어떻게 해결됐을까. 그런 물음들은 한반도 통일에 시사점을 제공할 포인트들이었다. 모두 합해 약 열흘간의 취재. 그 결과를 총 9개의 기사 형식의 글로 종합했다.

<한-독 청년통일마당 취재 기사 시리즈 3>

거듭난 매력 도시 베를린.

동떨어진 섬 같던 베를린
흉터에 그린 예술처럼
가난하지만 빛나는 도시 변모

서원 졸업생 정영주

1996년, 2008년, 그리고 2014년 세 번에 걸쳐 베를린을 방문한 리사 벤 스티푸치(26)는 서독 뒤셀도르프 출신이다. 그녀가 처음 베를린을 방문한 것은 초등학생 시절, 학교 현장학습 때였다. 96년, 8살 리사에게 선생님은 “베를린은 독일의 역사적 도시”라고 했다. ‘베를린은 역사적 도시’라는 생각에서 벗어난 것은 2008년이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스무 살 리사는 인턴십을 찾기 위해 베를린을 다시 방문했고, 거기서 왜 모두가 베를린을 ‘기회와 자유의 땅 – 새로운 베를린’이라고 하는지 직접 목격했다.

“혹시 ‘매력 자본’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나요? 요즘 한창 많이들 사용하고 있는 그 용어가 베를린을 한 마디로 설명해주죠.” 런던 정치경제대학 사회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런던 정책연구센터에서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인 캐서린 하킴은 2010년 옥스퍼드대학교 저널 「유럽사회연구」에 ‘매력 자본’이라는 용어를 발표해 세계적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설명하는 ‘매력 자본’은 아름다운 용모, 자기표현 기술과 사회적 기술이 합쳐진, 애매하지만 정말 중요한 자본을 의미한다. 한 때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이 지금의 매력적인 모습으로 거듭난 것은 정부의 개입과 하드파워의 강요가 아닌 분단 현장의 문화적 가치, 자유의 상징 같이 대체할 수 없는 ‘베를린만의 것’을 추구한 모두의 노력 덕분이다.

분단의 표상에서 글로벌 문화 도시로

통일 1년 뒤인 1991년 6월 20일, 서독의 수도 본(Bonn)에 있는 독일 연방 하원 의사당에서는 치열한 토론 뒤 투표가 개시됐다. 베를린을 통일 독일의 수도로 정할 것인지를 묻는 투표였다. 338표 대 320표. 마침내 통일 독일의 새 수도가 태어났다. 1961년 8월 13일, 독일과 유럽 나아가 분단 고착화를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뒤 30년 만의 일이다.

동독에 살다 서베를린으로 온 ‘이산가족’ 의 아들인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학과 학생 마르빈(22)은 “부모님은 서베를린을 늘 작은 섬이라고 했어요. 대부분 서독인과는 조금 다르게 살았고…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사회ㆍ경제적으로 동떨어진 느낌이었나 봐요” 라고 말했다.

독일인도 ‘섬’이라 부르던 베를린. 그러나 통일된 지금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일 뿐 아니라 유럽과 세계의 중심 역할을 하는 매력적인 도시가 됐다. 독일의 역사문화예술이 넘쳐나고, 수많은 국제적 행사가 개최되며, 독일 청년들이 갈구하는 창의적 삶이 펼쳐진다. 분단 역사가 생생하게 숨 쉬면서도 현대와 잘 융합돼 있기도 하다. 통독의 모습을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도시다. 그러나 베를린이 이처럼 거듭나기까지는 길고 긴 길을 걸었다.

통일 후 독일 사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진정한 내적 통일을 요원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구 동독 지역과 서독 지역의 생활 수준 격차는 분열의 중요한 원인이 됐다. 경제적 불만은 정치ㆍ사회ㆍ문화적 불만과 반감을 증폭시켰다. 통일이 달성되고, 이러한 격차는 무엇보다도 구 동독 지역에서 나타난 높은 실업률로 더욱 벌어지는 조짐을 보였다. 통일 직후 연방 정부는 베를린에 투자해온 산업 투자 장려금과 지원금도 중단시켰다.

그러나 통일 베를린은 특별조항과 정책 등으로 서서히 위상을 찾아갔다. 개정된 기본법 제12조 22항도 수도 베를린의 특별한 위상과 역할을 ‘베를린 특별조항’으로 명시했다. 특히 정책은 문화로 초점이 모아졌다.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이 발간한 『기초자료로 본 독일 통일 20년』에 따르면 통일 베를린 시의 문화정책은 크게 2단계로 대별된다.

먼저 베를린 장벽을 역사유적지로 복원하는 사업이 시작됐다. 정부는 분단 역사 현장의 문화적 가치를 인식하고 베를린 문화유산의 재건을 시작했다. 분단시대의 흉물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철거된 장벽으로 분단 극복과 재통일의 역사적 상징이자 분단 시대의 고통과 기억을 환기시켜주자는 것이었다. 장벽은 평화통일의 역사적 의의를 일상에서 깨우쳐 줄 수 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기도 했다.

 

3회 메인 사진1

예전 흔적 그대로 남은 장벽과 바로 뒤에 보이는 현대식 베를린 타워가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보여준다.

 

지난 10일 찾은 베를린 도심의 장벽 기념관에는 예전 흔적 그대로 남은 벽이 있었다. 장벽이 약 300m 가량 남은 구역은 평소 TV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던 우리나라의 공동경비구역을 연상케 했다. 단 한번의 개조나 수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장벽과 그 구역은 분단 당시 참담했던 모습과 폐허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주변에는 현대 베를린의 상징인 TV타워와 푸른 잔디밭 공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흔적은 존재 당시의 모습이 생생했다. 오히려 뚜렷하게 대비되는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는 이곳은 미묘한 감정을 자아냈다. 남북도 통일이 되면 이렇게 DMZ의 감시탑과 철망을 보존할 수 있을까.

‘베를린 장벽 프로젝트’ 같은 역사문화유적 보존 사업 외에도 통독 정부는 지역시민 참여문화를 활성화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베를린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장기 침체국면에서 문화예술 교육을 강화해 평생학습능력을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 독일 정부는 베를린이 그 중심이 되길 원했다. 2007년부터 베를린에서 개최된 동서독 영화제 같은 것은 베를린 시민에게 강렬한 문화행사였다.

베를린시 밀라 쿤스트 갤러리의 카탈리나 관장은 “베를린은 소중한 역사와 문화 예술이 결합된 도시”라며 “아픈 과거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에 훌륭한 예술가들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건 정말 다행이며 자랑스럽고 행복할 따름입니다. 사실 그들은 모두가 떠나서 물가가 싸다는 이유로 베를린으로 이사 왔지만 이렇게 역사적 흔적까지 아름답게 꾸며놓았으니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베를린을 ‘자유, 기회, 가능성, 도전의 상징’이라고 묘사하며 “베를린은 항상 변화합니다. 때문에 나에게 베를린은 세상에서 가장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도시입니다”라고 덧붙인다. 한때 적막한 냉전과 분단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베를린은 흉터 위에 그린 컬러풀(colorful)한 예술 작품처럼 빛나고 있었다. 베를린은 여전히 가난했지만 섹시했다. 2004년 당시 베를린 시장 클라우스 보벨라이트 (Klaus Wowereit)가 묘사한 그대로였다.

도시 변화의 원동력은 시민

베를린의 이런 위상은 구 동독 도시의 폐허화에 비하면 놀라운 측면이 있다. 2006년 기준으로 구 동독 지역의 도시들에 약 100만 채의 주택이 비어 있는 것으로 추산돼 왔다. 이에 대한 대책이 주로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취해져 왔지만 2002년부터는 문화 예술가들이 주축이 돼서 도시의 공동화 과정을 다양한 형태에 매체로 기록하고 문화 행사를 개최하고 대안적 건축 디자인 모델을 제시하는 획기적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수축하는 도시들’이란 제목의 프로젝트다.

카탈리나씨는 “구 동독 도시들의 공동화에 대응하기 위한 문화운동인 ‘수축하는 도시들’ 프로젝트는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진행됐고 예술가와 문화정책가, 미술사학자, 경제학자, 기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구 동독 지역의 도시 공동화 실태를 조사해 여러 방식으로 기록을 남겼습니다. 웹사이트 구축, 동영상 제작, 전시회 개최 같은 행사를 통하거나 대안적 건축 모델 및 조경계획 제시하여 큰 반향 불러일으켰죠.”라고 말했다. 구 동독 도시가 폐허화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베를린을 세계 그 어느 도시보다도 세련되고 인기몰이를 하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베를린 전체가 성공적으로 발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13일 자전거를 타며 둘러본 옛 동독에 속했던 베를린의 일부는 여전히 폐허로 남은 빌딩들도 남아있었다. 마치 범죄 조직원들이 모일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겉에서 볼 때 모든 유리창은 조각나 있었고 그 안으로 보이는 공간의 벽지는 갈기갈기 찢어져있었다. 빌딩의 외관에는 욕설의 그래피티로 가득 차있었고, 독일인 친구에게 현재 빌딩의 용도를 묻자 “보이는 그대로 공터”라고 설명했다.

통일 독일 정부는 또한 문화재정을 획기적으로 확충하며 문화재 복구와 함께 ‘박물관 섬’을 만들어 나갔다. ‘베를린의 이야기’ 박물관의 버나드 슈트 전무에 따르면 2006년 독일 전역 박물관 방문자는 약 1억 명인데 바이에른, 노스트라인-베스트팔렌, 바덴-뷔르템베르크 주(州)의 뒤를 베를린이 잇는다. 인구 수로 보면 각각 1850만, 1550만,1400만 명이다. 인구도 이들보다 작은 도시 베를린이 경제력이 크고 인구가 훨씬 많은 막강한 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양새인 것이다. 거기엔 수도인 베를린에 박물관이 밀집한 것도 있지만 인구수로 환산하면 베를린 시민 1인당 박물관 관람회수가 3.5회로 가장 높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사실 베를린은 박물관 수도 많을 뿐 아니라 시민들이 축이 되어 베를린의 가치와 정신을 찾아가고 있다. 8월 18일 ‘베를린의 이야기’라는 박물관을 찾았다. 천천히 테마의 방을 구경하다 ‘Into the Open Air’라는 곳에서 발을 멈췄다. 베를린 시민들이 각박한 산업화의 족쇄에서 벗어나 비어가든(맥주 공원), 공원, 댄스홀, 야외 호수 같은 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야외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모두가 그토록 목말라하는 ‘여유’란 대체 무엇일까.

2000년 이후 베를린 시민들은 행복한 삶의 가치와 철학을 생각하며 ‘여유로운 정신의 도시’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 통일을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 합병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동서간 상호이해와 협력, 소통과 통합의 중요성에 초점을 두기 시작하며 도시의 분위기를 바꿔나간 것이다. 통일 이후 베를리너들은 바쁘고 쉴 틈 없던 일상에 새로운 가치를 추가시켰고, 그것은 바로 진정한 동서통합에 필요한 소프트 요소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표현하는 베를린만의 자유로운 문화였다. 결과적으로 베를린은 통일 후 다른 분야에 비해 문화산업에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2004년 기준으로 광고와 소프트웨어 등 ‘창의산업’분야까지 합치면 독일의 전통적인 화학산업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할 정도이다.

박물관의 버나드 슈트 전무는 1980년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한 동독 출신인데 통일 후 베를린의 매력에 푹 빠져 베를린 박물관까지 인수했다. 슈트씨는 “베를린은 국가 계획도시가 아니라 시민들이 꾸리는 자유의 도시”라며 “정부가 많은 관심을 갖고 도우려 했지만 베를린에 적합하지 않은 정책을 강요하거나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베를린 고유의 것을 살리려 노력하고 시민들의 움직임을 응원하며 장려했죠. 그리고 시민들은 이런 정부의 결정에 따라 그들만의 도시를 지키고 만들어나갔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베를린이 통일 독일의 매력적이고 성공적인 수도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신축에는 없는 보존과 재건의 매력 기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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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는 오래된 건축물, 조각상 등이 늘 재건되고 있다

구 동독 지역에는 베를린 이외에도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포츠담처럼 아름답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도시들이 있다. 그 중 2012년 베를린의 외래 관광객 수는 10% 증가한 1,100만명을 기록했다. 베를린은 독일 내에서뿐만 아니라 마드리드를 제치고 런던, 파리, 로마에 이어 유럽 4위의 관광도시로 성장했다. 특히 외래 관광객 비중이 10년 전 전체 관광객 중 30%에서 42.5%로 크게 늘어났다. 베를린은 컨벤션 및 회의 개최지로도 각광받으며 회의 및 행사 개최 건수가 7% 늘어 12만 3,900건을 기록했다. 베를린관광청장은 베를린이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면서, 관광객뿐 아니라 창의적이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베를린으로 모여들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베를린 관광시장은 10년전에비해 2배 이상 성장했지만, 오늘날 베를린 공항은 여전히 초라했다. 지난 9일 밤늦게 도착하자 택시들도 보이지 않아 한참 애를 먹었다. 인천공항을 기준으로 보면 도무지 수도의 공항이라고 볼 수도 없을 만큼 허술하다. 일단 공항은 한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방문객 수에 비례하는 크기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공간은 작았다. 내부는 오래된 시설과 인테리어로써 심지어 베를린의 첫 이미지를 실망시킬 정도였다. 그럼에도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이 10년째 고공 행진한 것은 매력 자본 덕분이다. 그리고 그건 정부가 베를린에 부족했던 하드파워를 억지로 끌어올리기보다 가지고 있는 분단 역사 현장의 문화적 가치, 자유의 상징 같은 베를린 고유의 소프트파워를 잘 선택해 집중적으로 추진한 덕분이다.

베를린의 거듭남은 서울에서 흔히 보는 ‘신축’과 다른 ‘재건’이라는 점도 인상 깊다. 10일부터 18일까지 둘러본 베를린은 확실히 빠르게 성장하긴 했지만 경제 성장만 과시하는 현대식 건축물보다는 역사를 간직한 고풍스런 건물이 많았다. 대한주택건설협회의 2008년 ‘베를린 도시재생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베를린의 도시개조계획은 건축 밀도를 높여 개발 이익을 끌어내기보다 기존조직을 유지하고 불필요한 건축물은 줄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평가했다. 역사를 유지하면서도 재건과 개조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매력도시로 만든 것이다.

카탈리아씨는 “베를린은 역사를 보존하고 아름답게 승화시킬 뿐만 아니라 새롭고 참신한 젊음과 다문화의 도시로 성장했다”고 말하며, “이런 현상에 걸맞게 베를린은 낡은 건물을 재건하여 ‘전통’을 유지하되 ‘구식’의 분위기를 피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이점에서 슈트씨의 서울과 베를린의 비교가 인상 깊다. 그는 “서울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사실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보여준 사진을 보니 서울의 현재 모습이 좀 안타까워요. 온통 높은 빌딩들뿐인데 그게 과연 한국을 상징하는지 고민해 봐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25일 아산정책연구원에서 EBS Cross Culture 특강을 한 현 주한 체코 야나 할로웁코바 대리대사도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누구나 한번쯤 방문을 꿈꾸는 낭만의 도시로 유명하죠. 한국의 서울은 현대 경제 성장과 시장의 성공을 보여주는 도시입니다. 물론 새로움도 좋지만 한국 전통과 유산의 미를 부각시킬 수 있는 행사도 마련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 나라의 수도가 가져야 할 품위와 정신에 대한 환기다.

남북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북한의 부족한 면을 채우려 들 가능성이 높다. 공장도 많이 짓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며 그들의 낙후된 산업을 발전 시키려 할 것이다. 하지만 베를린은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라는 충고를 한다. ‘분단 기간 북녘 땅에 새겨진 북한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버리지 말고, 수치와 오욕이라도 우리 역사의 일부로 보존하며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지혜다.

사실 ‘폐쇄의 나라였던 북한’이라는 개념만으로도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들일 가능성은 높을 수 있다. 산마다 골마다 바위마다 새겨진 독재자의 이름은 부끄럽지만 그 또한 우리 현대사의 일부로 간직할 필요가 있다. 잘 교육 받은 북한 예술가들의 역량도 우리가 독려해야 할 잠재력이다. 베를린은 통일 이후 우리가 발굴해야 할 소프트파워, 매력 자본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그것이 어떻게 남북의 간격을 좁혀나갈 것인지에 대해 큰 지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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