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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Game Changer

음담패설 동영상 파문 이후 트럼프 대선가도는 거의 끝장났다는 분위기였다. 망해가는 트럼프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우리는 화석 같은 빌 클린턴의 옛 여인들을 또 다시 랑데부해야만 하는 것일까. 얼마나 지저분한 싸움으로 갈까. 현지 시각 10월 9일 열렸던 2차 대선후보 토론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 정도였다.

전반적으로 딱히 승자도 패자도 없는 ‘지저분한 비방이 난무한’ 토론회였다.

첫 30분간 문제의 음담패설 동영상에 관한 내용은 막장드라마 수준이었다. 각오는 했겠지만, 솔직히 음담패설 동영상 이야기가 그렇게 빨리 나올 줄은 필자만큼 트럼프도 몰랐던 듯 했다. 트럼프 캠프에서 지시한 것은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보다 훨씬 시급한 문제가 많다는 것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라는 것이었으리라. 방향을 트는 것까진 좋았는데, 불법 이민자, 국경, ISIS까지 틀어도 좀 많이 틀었다. 더군다나 불법 이민자나 국경 이야기를 트럼프가 꺼내면 자연스럽게 멕시칸 이민자를 성폭행범으로 몰아갔던 기억이 난다. 성폭행… 성폭행…음담패설… 더불어 자신이 대통령이라면 힐러리 클린턴을 감옥에 넣을 것이라니.

그래도 트럼프는 확실히 지난번 토론회보다는 준비된 모습이었고, 요소요소 효과적으로 클린턴을 공격했다. 특히, 이메일 스캔들과 오바마케어에 대한 공격은 상당히 날카로웠고 꽤 훌륭했다. 오바마케어를 뜯어 없애는 것이 우리 ‘공화당’의 목표라고 할 때엔 ‘아 맞다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였지’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공화당은 그리 트럼프를 버리려 하건만, 트럼프는 그렇게 자신과 공화당을 하나로 묶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럭저럭 잘 나가다 시리아 내전 주제가 나오면서 트럼프의 오바플레이가 독이 되었다. 급히 과외 받은 티가 나는 데다가, 부통령 런닝메이트인 마이크 펜스와 의견이 다르다고 똑똑히 말해버렸다. 펜스가 런닝메이트자리 때려치우려 한다는 루머까지 돌고 있는 마당에, 이렇게 생생하게 망해가는 집구석을 보여주다니. 부통령 토론회 이후 공화당원들이 펜스에 열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트럼프는 무조건 펜스를 신주 모시듯 해야 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린턴은 무슨 말을 해도 동요하지 말고 되도록 평정을 유지하자는 전략으로 나온 듯 했다. 그래서인지 1차 토론 때처럼 칠 때 치고 빠질 때 빠지는 여유로운 공격수 모습보다는 오히려 수비에 바쁜 모습이었다. 물론 숙제 열심히 하고 나온 사람답게 모범답안으로 잘 넘어갔지만, 트럼프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는 점이 왠지 수세에 몰리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했다. ‘잠깐, 이 토론회는 일방적으로 트럼프가 공격받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게 아니었던가? 근데 이게 왠 일이지?’

그러한 시각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클린턴이 상당히 방어도 잘 했고 이를 다른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전환시키는 것도 좋았다. 다만, 음담패설 동영상 발언 때 왜 더 강하게 몰아붙이지 못 했는지, 클린턴 지지자 입장에서는 아쉬웠을 듯 하다. 아무리 미셀 오바마가 “Go high”하자고 했다고 좀 너무 높이 간 건 아닌가. 또한, 말 많은 트럼프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을 기다렸던 듯싶은데, 오늘은 트럼프가 첫 토론회보다는 자기절제에 성공한 편이라 그 전략이 잘 통하지는 않았다. 잘했는데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훌륭한 퍼포먼스는 아닌 것이다. 그냥 지지는 않았지만 뭔가 아쉬운.

트럼프와의 기싸움에 밀려서 구겨졌던 1차 토론회 사회자인 레스터 홀트의 선례를 봐서인지, 사회자인 앤더슨 쿠퍼와 마사 래대츠는 그 역할을 충실히 했다. 계속되는 트럼프의 “왜 힐러리만 더 발언 시간을 더 주는 것이냐”는 항의에도 ‘너는 떠드시든지요’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기분탓일까? 마사 래대츠의 쎈언니 카리스마는 유난히 뛰어났다.) 그나저나 이 토론회는 분명히 타운 홀 포맷임에도, 두 후보 모두 유권자와의 거리감을 좁히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는 실패한 듯 하다. 이전의 타운 홀 토론회에서는 유권자와의 열띤 토론도 상당히 볼 만 했는데, 이번엔 유권자 질문단을 그냥 링 위의 두 선수가 치고 박고 싸우는 걸 구경하는 관중으로만 내버려 둔 점은 상당히 아쉽다.

결국, 서로 자기 편이 잘 했다고 우길 수 있는 토론회였다. 납세문제와 음담패설 동영상으로 수세에 몰려있는 트럼프로서는 선방한 토론회였지만, 이로 인해 큰 변동은 없을 듯 하다.

* 본 글의 내용은 연구진들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About Experts

김지윤
김지윤

연구부문

김지윤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여론연구프로그램 선임연구위원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선거와 재정정책, 미국정치, 계량정치방법론 등이다. 주요 연구실적으로는 “Cognitive and Partisan Mobilization in New Democracies: The Case of South Korea”(with Jun Young Choi and Jungho Roh, forthcoming, Party Politics), “The Party System in Korea and Identity Politics” (in Larry Diamond and Shin Giwook eds. New Challenges for Maturing Democracies in Korea and Taiwan. 2014. Stanford University Press), “기초자치단체에서 사회복지비 지출의 정치적 요인에 관한 연구” (이병하 공저 의정연구, 2013), 『국회의원 선거결과와 분배의 정치학』 (한국정치학회보, 2010), 『Political Judgment, Perceptions of Facts, and Partisan Effects』 (Electoral Studies, 2010), 『Public Spending, Public Deficits, and Government Coalitions』 (Political Studies, 2010) 등이 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UC 버클리대학에서 공공정책학 석사를, 미국 MIT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다.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