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포커스

신동혁 증언 번복에도
북한 인권현실 안 변해

“간수가 어머니를 교수대로 끌고 나오자 신동혁은 퉁퉁 부어오른 어머니 모습을 보았다. 간수는 어머니를 나무 상자 위에 세우고, 재갈을 물리고, 양팔을 등 뒤로 묶은 후, 목에 고리를 조였다. 퉁퉁 부은 눈은 가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눈으로 사람들 무리를 훑어 아들을 찾았다. 동혁은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간수들이 나무 상자를 밀자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대롱대롱 매달렸다. 어머니가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면서 신동혁은 어머니는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다.

나무 기둥에 묶이는 형은 수척하고 몹시 야윈 모습이었다. 간수 세 명이 각각 세 발씩 쏘았다. 나무 기둥을 묶은 밧줄에 총알이 끊어졌다. 피가 낭자하고 여기저기 파편이 튄 광경이 역겹고 겁이 났다. 그러나 그는 형 역시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14호 수용소 탈출 아산정책연구원이 번역한 신동혁의 『14호 수용소 탈출(Escape from Camp 14)』(왼쪽 사진) 117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자가 사형장에서 저렇게 비극적으로 만나는 사건이란 게 역사에서 존재하기나 할까. 야만의 시대가 아닌 현대 법치의 세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실제로 벌어졌다. 수용소는 그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 어머니의 죽음을 보게 했다. 사람들은 그게 사실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갑자기 혼란이 생겼다. 신씨가 지난 1월18일 자신의 증언 일부를 번복했기 때문이다.

신씨가 책에 쓴 증언의 핵심은 그가 ‘14호 수용소’로 알려진 평안남도 개천 수용소에서 태어나, 가족 뿐 아니라 인간의 기본 가치가 부정되고, 간수들이 수용자를 죽이는 극악한 인권 상황에서 2005년 탈북 이전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부모는 모범 수용자에 제공되는 특권인 ‘표창결혼’으로 맺어졌다. 그렇게 동혁이 82년 태어났으며, 그가 14세가 되는 96년 전후로 어머니와 형의 탈출 계획을 밀고했고, 그래서 자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이 처형됐으며, 동혁도 2004년 재봉틀을 떨어뜨린 죄로 손가락이 잘리는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씨가 어머니와 형이 처형된 곳이 18호 수용소였으며 고문도 20살 때 받았다고 번복한 것이다.

번복이 북한의 대남선전용 인터넷 매체인 ‘우리민족끼리’에 ‘거짓과 진실’이란 동영상이 올라온 뒤 나온 것이라는 점이 복잡하다. 동영상에서 신씨의 아버지는 그의 유치원 때 사진을 제시하며 “우리는 정치범 수용소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가족이 수용소 출신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또 이웃 주민이라는 송경란이란 인물은 동혁의 어머니와 형은 둘이 김춘애라는 여성을 살해했기 때문에 처형됐다고 주장한다. 북창군 봉창리 탄광에서 신동혁씨와 함께 일했다는 리봉은이란 사람도 신동혁의 손가락은 밤 길을 가다 돌밭에 넘어져 굴러내려 온 돌에 맞았는데 수술 뒤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윤영옥이라는 주민은 2001년 당시 13살이었던 딸을 신동혁이 강간했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신동혁은 성폭행범이며 거짓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자연 신씨의 주장을 부정하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나온다.

‘일부 증언 번복으로 진술의 기본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신동혁 주장의 기본 전제가 거짓이 돼버렸다.’ ‘신씨의 주장이 진실인데 북한이 주민을 동원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크게 비판 받아야 한다. 하지만 신씨가 과장했다면 북한 인권운동 진영도 도덕성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

북한이야 그렇다 치고, 국내 비판은 ‘탈북자 증언의 신빙성 문제’로 치부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의 증언이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 출범에 큰 영향을 줬다는 주장이다. 이를 뒤집으면 COI 보고서도 가짜에 놀아났다는 주장으로 발전되고 더 나아가 유엔 총회의 북한 인권 결의안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대해 1월 24일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한미연구소의 커티스 멜빈 연구원은 ‘거짓과 진실’을 분석해 북한이 신씨의 주장을 자기도 모르게 인정한다는 세부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런데 주장의 세부적 오류를 떠나 북한의 논리는 ‘논점 전환ㆍ일탈의 오류’이자 ‘인권 범죄를 부정하는 국가’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논점 전환ㆍ일탈’ 혹은 ‘주의 돌리기’ 오류는 ‘너 몇 살이야’ 싸움으로 비유할 수 있다. 한국적 갈등 상황에서 ‘너 몇 살이야’나 ‘왜 반말이야’라는 고성이 들리는 순간 싸우는 이유는 사라지고 엉뚱한 시비로 비화된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부각하면서 근본 문제를 감추는 방식이다. 논점을 흐리거나 불리할 때 화제를 바꾸거나 지엽적인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신동혁 증언을 문제 삼는 측의 문제는 분명하다. 그가 14호가 아닌 18호 수용소 출신이라는 것은 본질과 관계없다. 형사범 수용소에서는 인권 침해가 있어도 되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안 된다는 논리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가 어디서 살았건 책에는 있을 수 없는 인권 침해 사태가 무수히 기록돼 있다. 신동혁의 첫 기억은 나무 기둥에 묶인 사람을 공개 처형하는 장면이다. 어릴 때부터 1년에 세 차례씩 공개 처형을 구경했다. 어린아이에게 사형을 구경시키는 일이 현대 국가에 있어서 되는가.

동혁이 14세 생일이 막 지난 11월 말 몸이 U자 형태로 천정에 묶여 불 고문을 당했다는데, 그런 고문이 20세면 되고 14세면 안 된다는 논리 역시 성립 불가다. 이뿐 아니다. 밝혀야 할 인권 침해 주장이 너무 많다. 1998년 7월 홍수 때 무리한 공사로 학생과 작업 인부 수백 명이 물살에 휩쓸려 수장된 것, 시체 한 구를 찾을 때마다 간수들이 밥을 한 그릇씩 더 줬다는 것도 인권침해다. 손발이 쩍쩍 들러붙는 1998년 12월 혹한에 간수들이 어린 죄수의 혀를 쇠붙이에 한 시간씩 대게 해 피투성이로 만들어도 놔두고 여성을 멋대로 강간하고 임신하면 죽이는 현실에 눈감는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작은 부분 문제삼는 ‘논점 전환’ 수법

북한은 이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해 ‘신동혁은 거짓말쟁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문제를 제기한 핵심 인물을 그렇게 몰아붙이는 것은 ‘인권 침해라는 대규모 사건을 부정하는 국가’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

난징 대학살도 그런 사례다. 2004년 11월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라라 카운티의 인적 드문 고속도로 변, 한 중국계 여성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차 안에서 권총 자살을 했다. 자살한 아이리스 장(중국명 장춘루)은 1997년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 제2차대전의 잊혀진 홀로코스트』를 쓴 저자였다. 영어로 쓰인 20만 난징 대학살의 첫 번째 기록으로 전세계에 충격을 줬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인권 문제를 사실적으로 공개한 『14호 수용소』와 맥락이 같은 책이다.

그런데 아이리스 장의 책 중간에 실린 화보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마이니치 신문에 실린 사진을 실었는데 ‘도시에서 (난징)시에서 젊은이들을 실어서 트럭에 싣고 있는데 그들은 난징 교외 대학살장으로 실려갔다’는 설명이 달렸다. 그런데 이게 현장과 관계없는 사진이었다. 그 외에 몇 장의 다른 사진에도 오류가 있었다. 그러자 일본 우익이 이를 물고 늘어졌다.

그들은 『난징의 강간』을 반일위서(反日爲書)로 몰아가며 난징 대학살을 ‘20세기 최대의 거짓말’이라고 몰아갔다. 장을 ‘역사를 조작하는 마녀’로 비난했다. 일본 정부도 “37년 일본군이 난징에 입성한 뒤 민간인에 대한 살해와 약탈행위를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희생자 수는 여러 주장이 있어 단정키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금방 진위여부가 곧 드러나는 주장들이다. 일본 종군 특파원 오마나 유키오는 이렇게 기록했다고 한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은 자기 목이 잘리기 전 앞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됐지만 이런 방식으론 2000명 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을 난사했다.” 『난징의 대학살』에는 남녀, 어린이를 포함한 1000여 명 중국인에게 석유를 쏟고 바로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에 대한 증언이 있다. 여성을 강간해 죽이고 태아도 짓이겨 죽였다. 중국인 100인의 목베기 시합을 기록한 일본 신문, 무릎을 꿇린 중국인의 목을 자르는 사진, 군인이 시체를 양쯔강으로 버리는 사진, 학살한 시체를 소각하는 사진이 있고 심지어 극동군사재판소도 난징의 20만 대학살을 인정했지만 일본 우익과 그에 동조하는 정치인들은 무시한다. 몇몇 오류 발견→대대적 공격 혹은 물타기→국가적 부인이다.

인권 문제 부정하는 나라들의 전용 전술

위안부 사례도 마찬가지다. 1982년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사망)의 증언을 토대로 ‘제주도에서 200여 명의 한국 여성이 위안부로 동원됐다’는 내용을 포함해 16차례 관련 기사를 보도했다. 91년 8월 오사카판 사회면에는 일본군 강제동원 위안부 한국인 피해자 김학순의 증언을 처음으로 실었다. 이 기사를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기자가 썼다.

또 92년 1월 ‘위안소 군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 발견’이라는 1면 톱 기사를 실었다.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이 소장한 자료에 일본군이 전쟁중에 위안부의 모집을 감독ㆍ통제하고 현지의 군 부대에 위안소를 설치하도록 지시했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서를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가 공식 제기된다.

그러다 96년 요시다는 자기 증언에 허구가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당시는 조용했다. 그런데 18년이 흘러 아베 정부가 힘을 발휘하는 2014년 5월 아사히 신문이 요시다의 증언을 토대로 다룬 옛 기사를 취소하자 사태가 이상하게 전개됐다. 전과 달리 극우 세력과 보수 언론이 문제 삼고 나섰다. 극우 세력은 우에무라씨가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 대표의 사위라는 점을 물고 늘어졌다. 그는 표적이 됐다. 위안부와 여자 정신대를 혼동한 것도 문제 삼았다. 보도 당시에는 관련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모든 언론이 같은 오류를 범했지만 아사히만 문제 삼았다.

이어 강제 동원 자체를 부인하고 이를 ‘강제 연행의 증거’문제로 축소하기 시작했다. 위안부가 강제로 자기 의사에 반하는 생활을 강요 받은 여성의 인권문제라는 본질을 무시하고 ‘문서 증거를 대라’고만 되풀이 한다. 일본의 대월서점(大月書店)이 출판한 『종군위안부 자료집』이란 책에 많은 증거가 있는데도 그렇다.

아베 총리는 “아사히 신문의 오보로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했고 정부는 ‘고노(河野)담화를 계승하되 검증한다’는 기괴한 논리를 내놨다. 위안부를 ‘국제적 성노예’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권고한 유엔 인권위원회의 1996년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취소도 요구한다.

미국에서는 2007년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됐다. 당시 아시아 폴리시포인트의 민디 코틀러 대표, 의회조사국 선임연구원 래리 닉시 박사, 조지 워싱턴 대학의 마이크 모치주키 교수가 결의안 초안을 작성하고 통과를 주도했다. 아사히 신문 사태가 발생하자 민디 코틀러와 래리 닉시는 “요시다의 증언과 아사히 신문의 보도가 2006년 미국의 위안부 결의를 만드는데 고려된 요소가 아니었으며, 위안부 결의안은 수많은 증거에 기초했다”고 말한 것으로 넬슨 리포트 2014년 9월25일자는 전하고 있다. 이는 수많은 증거에 기초한 진실을 외면하는 일본을 비판한 것이다.

신동혁에 대한 북한의 주장, 난징 대학살과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몇몇 오류를 물고 늘어지고 극화하는 방식으로 공격해 본질에 물타기 한 뒤 최종적으론 국가가 나서서 모두 부인한다’는 공식을 보여준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신동혁 증언 번복 문제의 해결 방향은 간단하다.

우선 COI리포트가 활용한 증언에서 신동혁이 차지하는 비중을 이해시키면 된다. 372쪽 UN COI 보고서에서 신동혁의 진술이 일부 소개된 부분은 13개 문단 정도이며 단독 진술은 그 중 서너 개에 불과하다. COI 보고서는 식량권, 생명권 등 인권에 기초한 다양한 분석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정치범 수용소를 없애라는 게 유일한 초점도 아니다. 북한인권특별보호관이 10년 간 매년 북한인권 관련 보고서를 UN에 제출했지만 여기서도 정치범 수용소는 전체 내용 중 일부분이었다. 세차례 공청회에서 80여명의 피해자와 목격자가 공개 증언했고 조사위원은 240여 명 목격자와 비공개 면담을 했다. 신씨 증언은 그 중 일부일 뿐이다.

COI 보고서 작성 당시 위원장이었던 호주 법관 출신인 마이클 커비 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위원장도 21일자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신씨가 북한인권조사위원회에서 한 증언 가운데 일부에 오류가 있다 해도 인권보고서의 내용과 결론, 위원회의 유엔에 대한 권고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했다. COI위원이었던 마르주키 다루스만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도 23일 도쿄의 기자회견에서 “신 씨가 오류를 인정한 것이 COI보고서의 완결성과 신뢰성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AP통신은 전한다.

다음으로 북한에게 검증을 역제안하는 것이다. 어머니 사형 장면을 자식이 보도록 강제했는지, 신씨가 주장한 모든 인권 유린이 실제로 있었는지를 조사할 수 있게 북한이 문을 열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아울러 COI보고서에서 나오는 모든 침해 상황의 자유로운 현지 조사도 병행해야 한다. 이미 국제사회는 유엔 COI위원들의 현지 실사를 요구해 놓고 있다.

북한이 이를 수용하지 않고 신씨만 물고 늘어진다면 북한은 COI의 지적대로 폐쇄된 인권 침해 사회이며 이걸 감추려고 ‘논점전환의 오류’라는 뻔한 행태를 거듭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북한은 COI보고서와 관련해서도 조사관과 증언자 개인에 대한 시비만 거듭하고 있다. 국내와 국제사회가 이점에 눈을 뜰 필요가 있다.

 

About Experts

신창훈
신창훈

글로벌 거버넌스센터

신창훈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글로벌 거버넌스센터 국제법 및 분쟁해결프로그램, 핵정책기술프로그램 연구위원이다. 서울대에서 전기공학사, 법학 석사,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학 박사를 수여받았다. 주요 연구분야는 국제법 일반이론, 해양법, 분쟁해결절차, 국제환경법, 국제인도법, 대량살상무기 관련 국제조약 등이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국제해사기구(IMO)에서 투기에 의한 해양오염방지를 위한 런던의정서에 의해 설립된 준수그룹의 위원으로도 활동 한 바 있다.

김한권
김한권

지역연구센터 / 중국연구프로그램

김한권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지역연구센터장이다. 미국 코네티컷 주립대에서 정치학 학사와 행정학석사(MPA)를, 미국 American University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취득했다. Post-Doc과정을 중국 칭화대 (清华大)에서 마치고 (2008.03-2010.12), 칭화대의 국제전략과 발전연구소의 연구원 (2011.01-08)과 북경대 국제관계학원에서 연구학자를 지냈다 (2011.09-12). 이후 국립외교원 중국연구센터 객원교수로 재직하였다 (2012.01-06). 주요 연구분야는 중국의 외교정책과 민족주의, 그리고 북-중 경협이다. 주요 저서로는 『차이나 콤플렉스』 (공저), (아산정책연구원, 2014); “A New Type of Relationship between Major Countries and South Korea: Historical and Strategic Implications", The Asan Forum (E-Journal), (Dec. 20, 2013); The Implications of the Chinese “String of Pearls” for the U.S. Return to Asia Policy: the U.S., China, and India in the Indian Ocean. Journal of Global Policy and Governance . Volume 2 Number 2 (2013); “중국 당・군 관계의 변화와 북・중 관계 전망: 시진핑 시대의 당・군 관계와 대북 정책,”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12년 정책연구과제 1 (2013년 2월), pp. 281-316. (ISSN: 2005-7512); “The Multilateral Economic Cooperation for Tumen River Area and China’s Leadership” 『국제정치연구』, Vol. 13, no.2 (2010/12) 등이 있다.

안성규
안성규

편집전문위원

안성규 전문위원은 아산정책연구원 편집실의 주간이다. 중앙일보에서 30년 가까이 정치부ㆍ국제부 등에서 취재를 했으며 통일ㆍ외교팀 팀장, 중앙일보 일요판 신문인 중앙SUNDAY의 외교ㆍ안보에디터 등을 역임했다.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냈고 이후 독립국가연합(CIS)의 순회 특파원도 했다. 기자 초기에 북한의 국가 형성 과정을 집중 취재한 기획 시리즈에 동참했다. 그 시리즈는 학계의 북한 연구에도 크게 기여했으며 그 취재 내용을 담아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1992, 중앙일보)을 공저로 출판했다. 故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남을 인터뷰한 유일한 한국 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