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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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참석자,
“대북 군사협력
전면 재검토 진행중
협정 만료되면 곧 종료”

김한권ㆍ이재현 박사

2014년 6월 방문한 양곤은 1년 반 전과 전혀 다른 도시 같았다. 도로와 건물, 사람은 여전했지만 길에 넘치는 차량, 곳곳의 교통 체증은 낯설었다. 식민지 시대 지어진 건물과 나란히 서있는 명품 샵은 부조화를 넘어 그로테스크한 인상마저 주었다. 경제개방과 함께 수요 및 소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데, 사회적 인프라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병목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14년 6월 6일 양곤에서 아산정책연구원과 미얀마전략-국제문제연구소(Myanmar Institute of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이후 MISIS)가 공동 주최한 라운드 테이블이 열렸다. 연구소라지만 학자나 연구자들이 아닌 전직 외교관들이 많이 참석했고 드문드문 양곤대학 교수들도 자리를 잡았다. 이런 인적 구성은 현재 미얀마의 강대국 전략과 한-미얀마 관계를 살피는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 과거 자의나 타의로 폐쇄적이었던 미얀마 지식인 사회에서 유일하게 외부로 열린 창구였던 외교관, 그리고 양국 외교관계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던 전직 외교관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대중협력의 속도 조절

오랜 군사독재의 끝자락에서 정치개혁과 경제적 개방을 결정한 미얀마에 강대국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동남아에서의 미ㆍ중전략적 경쟁이 미얀마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2010년까지 미얀마의 군부 독재 체제는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제재로 고립된 상황이었다. 당시의 미얀마 정부에게 중국과 북한은 외부로 통하는 중요한 돌파구였으며, 당연히 이들 두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내부적으론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걱정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2011년 들어 떼인 세인 (Thein Sein) 대통령이 과감한 정치 개혁을 시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후 역내 중국의 부상을 의식하던 미국이 이런 변화를 환영하며 양국 관계 재정립을 시도하였다. 이후 미얀마에 대한 외부 제재는 중단되었으며, 떼인 셰인 대통령은 2012년 5월 미국을 방문하였다.

미국의 미얀마 접근과 동시에 미얀마도 중국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상징적 조치들을 취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미손(Myitsone)댐 건설 중단과 레트파다웅(Letpadaung) 구리광산 프로 젝트 갈등이다. 중국은 미얀마 북부 카친(Kachin)주 이라와디 강에 약 36억 달러 규모의 수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2009년 착공식 뒤 공사에 돌입한 이 프로젝트는 2011년 9월 미얀마 정부가 환경 문제를 제기하면서 돌연 중단되었다. 레트파다웅 구리광산은 중국의 완바오 마이닝 컴패니(Wanbao mining company)가 자본을 투입해 개발중이었는데 환경 문제로 지역 주민의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전 같으면 이런 상황은 미얀마 정부와 군에 의해 무마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미얀마 정부는 지역 주민 편을 들었다. 논란이 벌어졌지만 결국 중국 회사는 1100만 달러의 보상금을 주민들에게 지급해야 했다.

당황한 것은 중국이다. 제재를 받고 있는 미얀마를 지원해 자기 편으로 만들려는 의도는 어긋나고, 미얀마는 기대와 달리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중국에게 정치ㆍ외교적 손실뿐 아니라 안보전략에도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중국은 자국 에너지의 주 공급 루트인 중동ㆍ아프리카→인도양→말라카 해협→중국 남부 가운데 말라카 해협을 취약 지역으로 생각해 왔다.

중국의 송유관사업 0708-01

중국의 송유관 사업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해협을 우회, 확실한 안보 파트너인 파키스탄ㆍ미얀마에서 중국 서부ㆍ중남부로 송유관ㆍ가스관을 곧바로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파키스탄과 미얀마의 항구는 중국이 인도양으로 곧바로 진출, 인도를 견제하고 자국 해상 에너지 루트를 방어하는 주요 전략 기점의 역할도 겸하려 했다. 미얀마의 외교 전략 방향 변화는 중국으로서는 손실일 수밖에 없다.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베트남, 필리핀과 영토 분쟁에 휘말려 있으며 이로 인해 아세안 전체와 불편한 관계다. 더욱이 아시아 재균형 정책 이후 미국은 역내문제에 대해 사실상 직접 개입의지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안보 동맹국이자 중국과는 역사와 영토(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분쟁으로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일본이 인도와 ASEAN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가운데 확실히 자신 편이었던 미얀마의 배신(?)은 중국에겐 아쉬울 수밖에 없다.

미얀마와 한반도

지금 미얀마는 2011년 시작된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 개방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자유화와 개방에 힘입어 한류도 미얀마에 확산되고 있다. 미얀마 측 참석자들이 공통으로 꺼낸 화두가 한류였다. 한류를 통해 전파된 한국의 발전된 모습은 미얀마인 사이에 한국 호감을 높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 호감은 자신들도 한국과 같이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많은 유ㆍ무형 지원을 미얀마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한국 정부 역시 공적원조와 지식공유사업(knowledge sharing program) 등을 통해 미얀마와 우호관계를 강화하고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런 변화와 인식 사이에 한반도 문제가 겹쳐진다. 크게 두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미얀마와 북한의 핵을 포함한 군사부문 협력, 다른 하나는 1983년 양곤 아웅산 묘지에서 있었던 북한 테러다. 전자는 미얀마의 정치개혁 이후 한국을 비롯해 미국 등 많은 국가들이 지적한 바 있다. 후자는 많은 세월이 흘러 잊혀진 듯하나 미얀마와 북한 관계를 말 할 때마다 다시 회자되곤 한다.

미얀마전략-국제문제연구소와의 라운드테이블에서 미얀마-북한의 현재 관계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얀마 정부는 ”북한과의 군사협력을 원칙적으로 중단하겠다“는 말 외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번 라운드테이블에 참여한 인사들은 구체적인 언급을 했다. 왜 북한과 군사 협력 관계를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미얀마 측 참석자들은 서방의 제재를 꼽았다. 지난 20년간 서방의 경제ㆍ군사 제재 때문에 미얀마의 대외 창구론 중국과 북한이 유일했었고 이들과 경제ㆍ군사 협력관계가 형성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라늄 매장국으로 1955년부터 핵개발 의사를 밝혀왔던 미얀마는 2000년대 이후, 특히 북한과 국교가 재개된 2007년 이후 북한과 협력을 통해 핵개발을 추진해왔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북한에서 미얀마로, 미얀마에서 북한으로 선적된 화물 중엔 ▶cylindrical grinder ▶magnetometer ▶aluminum alloy rod 등 핵무기 개발에 활용할 수 있는 소재와 기구들이 발견됐었다. 핵미사일 용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북한 기술자들이 미얀마에 파견돼 미사일 발사시설로 활용될 수 있는 구조물을 건설했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로 확인된 바 있다. 미얀마는 북한과 군 시설 건설, 특수 부대 훈련 등 군사협력을 해왔다. 이같은 양국의 군사협력, 핵 협력 정황들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위한 것인지, 미얀마의 핵개발을 위한 것인지, 혹은 제 3국으로 핵기술 확산을 위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러 정황 증거들은 양자 사이에 ‘충분히 의심을 받을 만한 상호작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미얀마 측 인사들은 “현재 대외 상황이 바뀌고 경제 제재가 일시 중단되면서 북한과 핵 협력을 포함한 모든 군사협력이 재검토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핵 협력은 이미 중단됐고 핵 관련 유엔안보리의 결의 사항도 모두 준수한다는 것이다. 이 방향이 미얀마의 이익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점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다만 재래식 무기 관련 군사협력은 일부 유지되고 있음을 솔직히 밝혔다. 그러나 재래식 군사협력 역시 현 북한-미얀마 협력 협정이 만료되는 시점에서 모두 종료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 참석자는 과거 미얀마가 안고 있던 국제 사회에서의 오명에도 불구하고 미얀마는 대외적으로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는 자율성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 목소리를 높여왔던 외교적 전통이 있다고 말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 참석자는 북한의 핵개발 문제 등에 대해서 미얀마는 명확히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했다.

1983년 아웅산 테러와 관련, 미얀마 측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미얀마는 이 사건에 대해 강경 입장을 취해왔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은 버마식 사회주의를 주장했던 당시 미얀마 정부의 성향 등으로 미루어 미온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라는 예상을 크게 빗나간다.

당시 미얀마 정부는 사건 직후 북한의 테러리즘을 비난하며 외교관계를 중단했다. 외교관계가 재개된 것은 24년이 지난 2007년이다. 미얀마는 사건 조사가 일단락된 뒤 조사보고서를 UN에 제출하고 나아가 북한 정부를 불인정(de-recognise)하는 조치를 취했다. 단순히 한 국가의 특정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넘어 국가 자체를 불인정하는 매우 강력한 태도였다. 그래서인지 미얀마 참석자들은 한국이 미얀마와 북한의 외교관계 재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을 때 아주 조심스러웠다.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는 미얀마 인사들은 한국과의 관계, 북한과의 관계, 국제사회의 반응을 떠나 북한의 행동 자체에 크게 분개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자신들의 땅, 그것도 신성시한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묘에서, 손님으로 초청한 한국의 고위인사들에게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는 점에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미얀마를 둘러싼 남-북 관계, 그리고 국제사회의 반응은 묘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1990년 민주적 선거 결과를 뒤집고 다시 권력을 차지한 군부는 이전 버마식 사회주의를 탈피, 대외 개방, 자본주 수용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그러나 서방 국가들은 고립을 탈피하려는 미얀마에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로 경제ㆍ군사 제재를 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미얀마에서는 미얀마를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강대국 간의 각축이 나타나고 있다. 미얀마 정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강대국 경쟁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1983년 테러는 미얀마와 북한 관계를 최악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1990년대 서방의 미얀마 제재는 북한과 미얀마를 다시 협력 관계로 몰아갔다. 미얀마가 군사독재를 털고 정치개혁을 시작한 지금 한국은 미얀마의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지원하고 우리의 경험을 나누는 협력적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미얀마의 자유화, 민주화, 그리고 발전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북한과 미얀마의 관계를 약화시키고 종국에는 청산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