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칼럼

출처: South Koreans and Their Neighbors 2015, 아산정책연구원

출처: South Koreans and Their Neighbors 2015, 아산정책연구원

필자가 맡고 있는 여론조사 프로그램의 단골 조사 메뉴 중 하나는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지 3년 차가 됐지만 아직도 한일정상회담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베 총리 및 내각 멤버들의 망언으로 한국 국민의 대일 인식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으며, 이에 맞대응이라도 하듯 일본 내의 혐한 기류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렇게 교착된 상황에서 일본에 대한 인식조사는 주한 일본 대사관이나 외신뿐 아니라 미국, 중국의 정부 관리나 전문가들도 매우 관심을 보이는 주제다.

여론조사의 백미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을 때 이를 해독해 내는 일이다. 수수께끼를 풀 듯 갖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총 동원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본과 관련된 여론조사도 마찬가지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악감정 혹은 비호감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다양한 모습이 발견된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포인트는 세대간 간극이다. 세대 차이는 다른 이슈에 있어서도 종종 드러나지만 일본에 대한 태도의 차이는 무척 흥미롭다.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젊은 세대 특히 20대에는 여타 세대에 비해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옅다는 점이다. 오히려 긍정적인 시각마저 느껴진다. 일본 문화와 음식, 상품에 긍정적이고, 일본인에 대해 다른 세대보다 덜 적대적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중국과 중국인, 중국 문화에는 덜 가깝게 혹은 부정적으로 느낀다. 물론 20대도 최근의 역사 갈등에는 유감스러워 한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거리에 울려 퍼지는 J-Pop이나 즐비한 일본식 선술집 ‘이자카야’, 그리고 ‘도깨비 여행’이라고 한국 청년들 사이에 유행하는 초스피드 일본 여행도 엔저 현상에 따라 늘어나는 모습을 보면 20대의 일본에 대한 호감이 두드러지는 여론조사 결과가 엉뚱한 것 같지는 않다.

이쯤 되면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께서는 서운해 하실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일본 식민 치하에서 그토록 고초를 겪었는데 어찌 너희는 일본에 대해 관대할 수 있느냐고. 아버지의 원수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네 도덕관의 일부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너도 싫어해야 한다는 논리가 얼추 통하는 게 우리 사회이기도 하다. 정신 상태가 해이해져 과거 역사를 쉽게 잊어버린다는 질타도 가능하겠다.

사회학적으로 풀어보자면 그 차이는 20대들이 겪은 일본이 기성세대가 겪은 일본과 다른 데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칼 만하임(Karl Mannheim)이나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 같은 학자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걸친 시기를 ‘형성기(formative years)’라고 명명하며, 이 때의 경험이 그 사람의 전 인생에 걸쳐 이념이나 가치관, 정치적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습득력이 가장 뛰어나고 주변의 영향도 많이 받으며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이 시기의 경험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각 세대별로 일본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태도는 사뭇 달랐다. 60대 이상의 노년층은 일본 식민지의 수탈과 폐해, 그 영향이 직접 미친 해방 직후의 혼란, 이후 고난스럽게 펼쳐졌던 현대사를 젊은 시절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세대이다. 그들의 회한과 원망은 일본, 그리고 북한을 향해 있다. 40대와 50대는 이와는 살짝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산업화 시대를 온 몸으로 부딪치고 경제 성장을 일구거나 그 모습을 목도해 온 세대이다. 이들에게 일본은 감히 따라잡기 힘든 나라, 경제성장을 이룬 아시아 유일의 선진 국가, 이른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었다. 이들에게 그게 억울하고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를 침략하고 수탈했음에도 한국전쟁 특수로 하루 아침에 일어서는 게 옳으냐는 생각 때문이다. 왠지 이 세상에 정의는 없는 것 같은 동시에 저 얄미운 이웃 나라의 말끔하고 세련된 모습이 경이롭게 보이는 게 마음을 더 괴롭혔다. 10대 마음의 한 켠엔 소니(SONY)사의 워크맨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있었고, 어머니들은 코끼리표 밥통을 집에 들여놓고 마음을 뿌듯해 하던, 머리와 가슴이 따로 움직이던 시대를 살아온 세대였다.

젊은 세대 특히 20대는 이러한 경험들과 떨어져 있다. 이들이 경험한 한국과 일본은 그 전 세대가 경험한 나라들이 아니다. 일본에선 1990년대 이후 버블 경제가 무너지고 장기 불황이 닥치면서 경제 파워는 끝없이 추락했다. 미국까지 집어 삼킬 듯 했던 일본은 간데 없고, 잘 나갈 때에는 미덕으로 보였던 근검절약도 경제불황이 지속되자 궁색한 삶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2011년 일본 동부 해안을 덮친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한국 젊은 세대의 일본관을 형성하는 종결자나 마찬가지였다.

이와 달리 1997년 외환 위기를 극복한 이후 한국은 눈부시게 다시 도약했다. 나름 IT 강국으로 선전하며 세계 경제에 등장했다. 이젠 가정용 TV를 구매할 때 소니 제품이 비싸다고 망설이고, 아쉬운 대로 만족하자며 삼성 것을 사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가 예전에 어떻게 하면 일본처럼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을까 절치부심하며 문의했던 것처럼,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어떻게 하면 한국처럼 경제 성장과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을까 묻고 있다. 지금의 20대는 바로 이런 환경에서 자랐다.

그런 점에서 20대의 일본에 대한 호감은 ‘한껏 높아진 한국인의 자존감이 표현된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들에게 일본 식민지배 역사가 치욕스럽고 아프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는 몰라도 일본만은 꼭 이겨야 한다는 심리기제로 작용할 필요는 없다. 일본의 1인당 국민 소득이 한국보다 높지만 그걸 언제 따라잡을까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문화와 상품은 깔끔하고 아기자기해 눈이 가는데 한국의 문화와 상품은 비루하다는 열등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한국이 일본에 문화를 전수해 준 원조국’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된다. 수준을 비교하며 자존심 상해하지도 않고 굳이 우월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20대에게 한국은 한국이고 일본은 일본이기 때문이다.

대형 서점에 가면 자기 계발서와 심리학서들이 베스트셀러만 놓일 자격이 있는 매대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다수가 ‘자존감을 높이라’고 외친다. 남의 눈을 의식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행태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기 때문에 낮은 자존감에 시달릴 수 있다며 경고한다. 개인의 삶에서 자존감 수준이 어떤지 알긴 어렵지만,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일본에 대해 갖는 국가 자존감만큼은 기성 세대보다 훨씬 높은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축구 국가 대항전이 아닌 다음에야, 일본을 꺾어야만 하고 미워해야만 하고 이들이 얼마나 못된 국가인지 만천하에 낱낱이 고할 필요성을 굳이 느끼지 않는다. 이들에게 일본은 그저 한 때 한국을 괴롭혔고 아직도 반성을 모르는 (어떤 면으로는 못난) 이웃 나라에 불과하다. 조금은 배신감 느끼게 만드는 젊은 세대의 국가 자존감이 왠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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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
김지윤

연구부문

김지윤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여론연구프로그램 선임연구위원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선거와 재정정책, 미국정치, 계량정치방법론 등이다. 주요 연구실적으로는 “Cognitive and Partisan Mobilization in New Democracies: The Case of South Korea”(with Jun Young Choi and Jungho Roh, forthcoming, Party Politics), “The Party System in Korea and Identity Politics” (in Larry Diamond and Shin Giwook eds. New Challenges for Maturing Democracies in Korea and Taiwan. 2014. Stanford University Press), “기초자치단체에서 사회복지비 지출의 정치적 요인에 관한 연구” (이병하 공저 의정연구, 2013), 『국회의원 선거결과와 분배의 정치학』 (한국정치학회보, 2010), 『Political Judgment, Perceptions of Facts, and Partisan Effects』 (Electoral Studies, 2010), 『Public Spending, Public Deficits, and Government Coalitions』 (Political Studies, 2010) 등이 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UC 버클리대학에서 공공정책학 석사를, 미국 MIT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다.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