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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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에 한번꼴
태국 쿠데타
심층 분석

이재현 박사 (연구위원, 아세안대양주연구프로그램) jaelee@asanist.org

2014년 5월 20일 태국과 국제사회는 2006년 일어났던 18번째 군사쿠데타에 이은 19번째 군사쿠데타의 서막을 목격했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을 위해 일어났던 군사쿠데타 이후 19번째 군사쿠데타가 전격 단행되었다. 이날 쁘라윳(Prayuth Chanocha) 태국군 사령관은 TV를 통해 정치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 조치는 군사쿠데타는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이틀만인 22일에 군은 공식적으로 군사쿠데타를 선포하고 정부기관들을 군의 통제 하에 둔다고 발표했다.

이틀간 일어난 일들을 놓고 볼 때 군사쿠데타가 자주 일어나는 태국에서는 쿠데타마저도 법적 절차와 의미, 그리고 제도화된 단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생각마저 든다. 대개 군을 동원하여 신속하고 비밀리에 정권을 탈취하고 국가를 장악하는 쿠데타는 법적 효력이나 절차 등을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번 쿠데타에서 태국군은 사실상 국가를 장악한 20일,“ 이번 조치는 정치적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계엄령만을 선포한 것이지 쿠데타는 아니다”라고 명확히 못 박았다. 그리고 이틀간 대립하고 있는 정파간 형식적 대화를 추진하고, 22일 이 대화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쿠데타를 만방에 선포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림 1. 태국 총선 결과로 본 지지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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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민주당, 친국왕세력 / 붉은색: 친탁신세력 (자료-인터넷)

 

이번 군사쿠데타는 어떤 배경 하에서 왜 발생했을까? 이번 쿠데타를 가져온 일련의 정치적 대립은 국제사회에 노란셔츠(Yellow Shirts)와 붉은 셔츠(Red Shirts)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치적 대립은 길게는 1997~98년 아시아 경제위기, 보다 짧게는 2006년에 있었던 태국의 18번째 군사쿠데타에 뿌리가 있다. 보다 더 근본적인 모순을 따지면 1932년 입헌군주제 쿠데타로 등장한 태국이라는 국가가 가진 권력을 둘러싼 근본 모순까지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이전의 군사쿠데타들에서 보여주었던 태국 쿠데타의 특징 즉, 이념, 정책, 사회적 근본 모순에 관한 쿠데타가 아닌 매우 실용적인 차원의 쿠데타라는 특징과 이번 쿠데타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직전 쿠데타인 2006년의 군사쿠데타는 전 총리인 탁신(Thaksin Shinawatra)을 축출하는 쿠데타였다. 탁신은 1997~98년 태국의 경제위기를 틈타 등장했고 이후 태국 정치사에서 볼 수 없었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권력기반을 형성했다. 한 정당이 과반 의석을 독점한 것은 탁신의 타이락타이 정당이 태국 정치사에서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늘 권위주의, 독단적 국가 운영, 인권 문제, 그리고 포퓰리즘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이런 비난들과 탁신의 왕권에 대한 암묵적 도전은 왕과 이를 둘러싼 전통 권력 엘리트, 고위 관료, 군, 그리고 탁신의 포퓰리스트적이고 독단적인 국가 운영에 반대한 지식인의 도전에 직면했다. 이런 도전을 압축한 것이 탁신을 축출한 2006년 쿠데타이다. 이에 대해 탁신 집권 시기 많은 혜택을 받은 친(親)탁신 세력, 즉 농민, 도시 빈민 등 탁신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왕과 친 국왕 세력을 상징하는 노란색에 대한 반대로 붉은 색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붉은 셔츠와 노란 셔츠의 대립이 시작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붉은 셔츠는 친탁신파, 노란 셔츠는 친국왕파를 상징한다.

 

대립하는 정치 세력
Yellow Shirts – 친국왕세력 Red Shirts – 친탁신세력
국왕 및 왕실
고위 관료(privy council, 법원, 행정부)
고위 군부
보수적, 교육 받은 중산층
부유한 세력
탁신 및 그의 정치적 추종자
도시 빈민과 농민 등 저소득층
공화주의자
민주당 (중·남부 지지) 친 탁신 정당 (북부·북동부 지지)
– Thai Rak Thai Party (1998~2007)
– People’s Power Party (2007~2008)
– Pheu Thai Party (2008~2014)
실질적 권력과 재력 국민 다수의 지지

 

일부 분석들은 친탁신과 반탁신을 단순히 사회경제적 배경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근본적 모순도 함께 존재한다. 친탁신 파의 일부는 태국 내 공화주의 세력이다. 다시 말해 현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 이 세력이 친탁신파에 가담한 데는 탁신 집권 시기 그가 보여준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태도가 있다. 태국에서 국왕은 절대적 존재다. 현재 푸미폰(Bhumibol Adulyadej) 국왕은 한때 국민의 절대적 존경을 받았었다.

국민을 위해 국왕이 많은 자선사업과 시혜를 베푼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젊은 시절 푸미폰 국왕은 1년의 1/3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개선 문제를 현장에서 챙기곤 했다. 정치적 영향력도 강력했다. 과거 군사 쿠데타를 성공한 군부라도 최종적으로 국왕이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 그대로 권력을 내려놓고 망명길에 오른 예도 있다. 중요한 정치적 위기 시 사태를 정리한 것은 언제나 국왕이었다. 현재 일반 국민 사이에 국왕에 대한 존경은 여전하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에는 많은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푸미폰 국왕은 현재 87세이고 68년째 통치중이다. 고령인데다 와병중이다. 정치적 권위도 과거만 못하다. 당연히 승계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푸미폰 국왕은 몇 명의 아들과 딸이 있는데, 현재 유력한 계승자는 둘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문제가 있다. 왕위를 잇게 되어 있는 와치라롱콘(Vajiralongkorn)왕자는 지금까지 국민에게 보여준 행적으로 인해 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태국 사람들은 이런 왕자의 행적을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못하지만, 다양한 추문과 부패에 연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이런 측면에서 시린돈(Sirindhorn) 공주는 보다 국민에게 존경을 받고 아버지를 빼닮았다. 특히 국민을 위해 고민하고 현장에 관심을 가진 젊은 시절 아버지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하는 모습이 신뢰를 받고 있다. 하지만 공주라는 점이 왕위 계승의 걸림돌이 된다. 권력의 측근에 있는 사람들과 군부 역시 왕자파와 공주파로 갈려 있는 상태다. 정국의 혼란, 국왕의 와병에 승계 구도 문제까지 맞물려 국왕의 권위와 국왕에 대한 신뢰가 기로에 서있다.

입헌군주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도 있다. 태국 내 공화주의자들은 1932년 입헌군주제가 사실상 국왕과 그를 둘러싼 전통 지배계급의 통치를 연장하기 위한 눈속임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형식적으로는 입헌군주제인 듯하지만 실질적으로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게 있지 않고 여전히 국왕과 그를 둘러싼 소수의 전통 지배계급과 군이 국가의 부와 권력을 좌우하고 있다고 이들은 보고 있다.

실제로 왕가가 태국에서 가장 부자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라고 알려졌다. 포브스는 태국 왕실이 세계 왕실 가운데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혀 태국 내에서 논란을 촉발시킨 바 있다.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태국 왕실의 재산은 미화로 100조에서 350조까지 다양한 예상들이 있다. 시암 시멘트, 시암은행 등 태국의 굵직한 재벌급 기업들과 방콕의 주요 쇼핑몰, 최고급 호텔 가운데 왕가의 소유가 다수 있다. 왕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왕실재산국(Crown Property Bureau)은 부동산 임대사업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경제활동에서 발생하는 왕실의 모든 수입에 대해 소득세가 면제된다. 국왕의 국민에 대한 시혜는 이런 부의 아주 작은 부분을 내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거 절대왕정 시기 통치 세력, 즉 왕을 보위하던 고위급 신하들과 군대가 입헌군주제 쿠데타 이후 그대로 고위관료로 탈바꿈했고, 군부 역시 국왕을 보위하며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1932년 입헌군주제를 위한 쿠데타는 이 관료들과 국왕 세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국왕은 존재하되 상징적 인물이고 실제 권력은 국민에게, 그리고 이 국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총리에 의해서 권력이 행사되는 입헌 군주제와 태국의 입헌군주제는 거리가 있다. 총리를 정점으로 한 민간 정부는 국왕권 하에서 일상적 행정 처리만을 하는 조직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지난 70여 년 간 절대 신성으로 여겨졌던 국왕에 대한 이런 질문들이 이어지면서 최근 몇 년간 태국 정부와 군은 국왕모독에 관한 국민 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볼 때 붉은 셔츠 세력은 탁신 전 총리의 개인적 추종 세력, 그의 재임 시절 경제적으로 혜택을 본 빈민, 농민 계층의 경제적인 바람에 공화주의적 운동까지 복잡하게 포괄된 세력이다. 반면 노란 셔츠 세력은 국왕과 그 주변의 전통 엘리트, 군, 교육받은 보수적 중산층,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현 민주당 세력이 이 집단을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갈등에는 1932년 이후 태국 정치의 근본 모순에서부터 개인의 경제적이고 정치적 이익까지 다양한 정치적 아젠다들이 한꺼번에 녹아 있다.

수적으로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친탁신 세력은 최근 대법원 판결에 의해서 총리직을 박탈당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Yingluck Shinawatra) 총리까지 2006년 이후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아서 집권했다. 붉은 셔츠를 지지하는 세력의 수적 우위로 인해 선거에서의 승리는 거의 보장되어 있다. 반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중추, 즉 관료제, 법원 그리고 군을 장악한 노란 셔츠는 선거로 구성된 친탁신 정부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주로 자신들이 장악한 법원의 판결을 통해서 총리의 자격을 정지시키고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새로운 선거를 통해 다시 권력을 통제하려 시도해왔다. 2006년 쿠데타 이후 이런 식으로 총리가 해임되고 정부가 바뀐 것만 이번 잉락 총리까지 합쳐서 세 번째이다.

이번 2014년 5월 군사쿠데타는 친탁신파인 잉락 총리를 대법원에서 일차로 자격정지시킨 뒤 친탁신 계열을 더욱 무력화시키기 위해 취해진 조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 경험을 놓고 볼 때 법원에서 친탁신 총리와 정당을 무력화 시키더라도 결국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고 선거를 치르면 다시 친탁신 세력들이 집권하는 과정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노란 셔츠와 친국왕 세력들은 이전의 이런 전철을 밟지 않고 보다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새로운 방편으로 쿠데타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2006년 이후 태국 쿠데타 일지
2006.9 쿠데타로 탁신 당시 총리 축출
2007.5 탁신의 타이락타이당 법적으로 무효화
2007.12 탁신 지지자 중심의 People’s Power Party(PPP) 총선 승리
2008.5 Yellow Shirts 거리 시위 시작, 사막(Samak) 총리 사임 요구
2008.9 법원 PPP의 사막 총리 결격 사유로 해임 결정, 같은 당 솜차이(Somchai) 총리 취임
2008.10 법원 탁신 전 총리 부패혐의 기소
2008.11 Yellow Shirts 방콕 공항 점거
2008.12 법원 PPP 정당 해산 결정, 이에 따라 총리 자동 해임, 야당인 민주당 아피싯(Abhisit) 총리 취임
2009.4 친탁신파 Red Shirts 시위대 거리 시위 및 군대와 충돌
2009.7 탁신파의 Pheu Thai Party 총선 승리, 탁신 여동생 잉락(Yingluck) 총리 취임
2013.2 Yellow shirts 시위대 총리실 포위
2013.12 Yellow Shirts 시위대 총리실과 정부 청사 점거
2014.2 총선 실시, 69개 선거구에서 시위대의 방해로 선거 치러지지 못함
2014.3 태국 헌법재판소 2014년 2월 총선 무효 선언
2014.3 잉락 총리 부패혐의 기소, 재판 시작
2014.5.6 잉락 총리 권력남용 혐의 법정 출두
2014.5.7 잉락 총리 부패혐의 기소, 재판 시작
2014.5.20 군부 계엄령 선포
2014.5.22 태국 군부 군사쿠데타 선언

 

이전과 달리 이번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와 친 국왕파는 선거를 회피할 수는 없다. 국민의 눈높이나 국제사회의 이목 때문이다. 그래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도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선거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번 쿠데타 세력이 2006년 쿠데타 세력이나 그 이후 법원을 통해 친탁신파 정부를 제거했던 세력과 다른 점은 선거 전까지 헌법과 의회의 기본 구조를 뜯어고쳐, 친탁신 세력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다시 잡는 것을 가급적 차단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군사정부는 임시 헌법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선거를 통해서 하원을 구성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의 근간은 바뀌지 않겠지만, 많은 새로운 장치들을 통해 기득권 세력의 의석수를 늘리려 할 것이다.

근본적인 모순과 대립이 해결되지 않는 한 친탁신 세력이 가진 숫자의 힘과 친국왕 세력이 가진 실질적 권력이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충돌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지금 태국은 많은 신생독립국이 독립 직후 겪었던 새로운 국민국가의 정체성과 기본 권력구조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지금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국가들이 독립 혹은 국민 국가 수립과 함께 권력을 누려왔던 국왕이나 구세력과 새로 등장한 민족주의 세력 혹은 시민세력 간에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이런 투쟁과 갈등이 마무리된 자리에 새로운 국가의 권력 구조와 정체성이 자리 잡았다.

태국은 국왕의 권위 아래 1932년 입헌군주제 쿠데타라는 편리한 도구로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까지 미뤄왔는지도 모른다. 형식적으로는 국민이 권력을 가진 듯하지만, 실제로는 구체제 하의 권력이 온존하고 있는 채로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것이다. 이제 1940~60년대 아시아의 신생국이 겪은 것처럼 태국에도 큰 진통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