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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조지아주에서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을 급습한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부(DHS)는 한국인 317명을 포함한 475명의 외국인 근로자를 체포 및 구금했다. 미 당국의 주장은 간단명료했다. 이들이 전자여행허가(ESTA)나 최대 6개월의 출장이 허용되는 단기 상용 비자(B-1)로 입국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생산과 공사 업무를 수행해 비자 목적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한편 9월 19일 트럼프 대통령은 갑자기 미국 전문직 취업 비자(H-1B) 신청 수수료를 기존의 100배 수준인 10만달러(약 1억3990만원)로 인상했고, 단기 비자인 ESTA 신청 비용도 대폭 올렸다. 이런 일련의 행정 조치는 미국 이민·비자 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탄이자, 미국 혁신 경제와 글로벌 기업 생태계에 직격탄을 날린 충격적인 결정이다.
미국 비자 제도 크게 바뀔 가능성 커
현재 미국은 이민·취업·연수·관광 목적에 따라 다양한 비자 체계를 운용하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ESTA는 방문 비자로서, 한국과 같이 무비자 협정국 국민이 90일 이내 단기 체류 시 적용된다. 관광과 비즈니스 목적으로만 가능하고 미국 현지 노동은 금지된다. B1·B2는 ESTA가 시행되기 전 미국 단기 방문 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비자다. 한 번 승인받으면 최대 10년간 유효하고, 최대 6개월까지 체류가 가능하다. 또한 ESTA와 달리 미국으로 입국한 한 후 다른 비자로 신분 변경이 가능하다. 하지만 ESTA 체류 기간보다 더 오래 미국에 머무르는 경우에는 그 체류 목적이 분명해야 하며 이를 증명할 증빙이 필요하다. 통상적으로 회의 참석이나 단순 출장에는 적합하지만, 구체적인 작업 요건이 기재되지 않았다면 공장 현장 근무에는 적합하지 않다. H-1B는 전문직 취업 비자로서,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인재의 취업 비자다. 미국 기업이 전 세계로부터 인재를 유치할 때 가장 널리 활용하는 비자 형태이기도 하다. H-1B는 일반적으로 3년간 유효하며, 최장 6년까지 미국 체류가 가능하다. 매년 학사급 6만 개, 석사급 이상 2만5000개 등 총 8만5000개의 비자가 발급된다. 추첨을 통해 선정되고, 경쟁률이 10 대 1이 넘는 것이 보통이다. L-1은 다국적기업 주재원 비자로서, 한국 기업이 미국에 법인을 세우고 한국 본사 임직원을 5년 또는 7년 기한으로 파견할 때 주로 활용한다. 배우자가 취업할 수 있으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도 있다. 무역(E-1) 또는 투자(E-2) 비자로 알려진 E의 경우는 미국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외국인 유학생이 학위 과정에 등록할 때 발급하는 F는 학업이 목적이며, 원칙적으로 취업은 불가하다. J는 교환 방문 학자, 인턴, 연구원 등을 위한 비자로서, 일정 기간 후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귀국 의무가 따른다. 비자 수수료는 비자 형태를 불문하고 보통 200달러(약 27만9800원) 내외였으나, H-1B 수수료가 10만달러로 올랐기 때문에 다른 비자 수수료도 향후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
공장 건설과 비자 문제 상충하는 한국 기업의 현실
문제는 한국 기업이 미국 현지에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할 때 발생한다. 우리 기업이 공장을 건설할 경우 본사와 계열사에서 숙련 기술자와 엔지니어를 파견한다. 이런 활동은 원칙적으로 B1·B2로는 불가능하다. 일각에서는 H-1B나 L을 받고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현실을 모르는 주장이다. H-1B는 연간 발급 한도가 너무 적고 무작위 추첨으로 운영된다. 실제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L의 경우에도 까다로운 요건이 많아 모든 직무에 적용하기 힘들다. 비용도 문제다. 기존의 불합리한 규정을 따른다면, 한국 기업은 수개월에서 수년의 행정절차와 엄청난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이제 H-1B 신청 수수료가 대폭 오르면서 대기업조차 부담하기 힘든 장벽이 됐다. 공장 건설과 여기에 투입되는 인력의 비자 문제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 2020년 이후 지금까지 140조원 이상 미국 현지에 투자한 한국 기업은 이제 현지 프로젝트 지연과 비용 증가가 불가피하다. 향후 한국 기업이 미국 내 투자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의 현지 투자로 인한 공장 설립 및 현지 교육을 위해서는 H-1B의 변형이나 E 비자 같은 별도의 전문직 비자 쿼터가 절실하다.
위대한 미국과 마가 이민정책의 모순
트럼프 정부가 내세운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기조는 반이민주의로 가고 있다. 사실상 과학기술 인재의 미국 진입을 차단하겠다는 신호다. 이 정책은 미국이 전통적으로 자랑해 온 아메리칸드림을 스스로 걷어차고 혁신을 질식시킬 위험이 크다. 실리콘밸리와 보스턴 바이오클러스터는 수많은 유학생과 이민자 인력에 의존해 왔다. 미국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는 매년 수천 명의 H-1B 비자 소지자를 채용해 왔다. 이제 마가 이민정책은 인재 확보 경쟁에서 미국을 불리하게 할 것이다. 이미 캐나다, 호주, 영국 등은 STEM 인재 유치를 위한 친이민정책을 확대하며 ‘포스트 실리콘밸리’를 준비하고 있다. 빅테크는 이민 규제 강화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발하며, 글로벌 혁신 생태계의 경쟁력 저하를 경고하고 있다. 마가 이민정책으로 연구개발 인력 공백이 생기고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도 위축될 것이다. 미국이 스스로 기술 패권을 약화하는 길을 걷는 셈이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의 가장 큰 자산인 개방성과 포용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반이민 비자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정치적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미국 혁신 경제의 심장을 겨냥한 자해 행위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 기업은 미국 투자의 리스크를 재평가하게 될 것이고, 글로벌 인재는 미국 대신 다른 기회의 땅을 찾게 될 것이다. 트럼프식 반이민정책은 아메리칸드림을 걷어찬 것일 뿐만 아니라, 결국은 미국 자국의 미래를 갉아먹는다.
* 본 글은 9월 29일자 이코노미조선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객원선임연구위원
김흥종 교수는 현재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특임교수이고, 태국개발연구원(TDRI)의 국제자문위원이자, 세계디지털경제기술정상회의(WDET)의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이며, 한·러대화(KRD) 위원이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과 한국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KOPEC) 위원장을 지냈다. 또한 아시아태평양EU학회(EUSAAP) 회장, 한국EU학회(EUSA-Korea) 회장, 한국APEC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2023년에는 인도 G20 Think20에서 TF 공동의장을 맡았다. 김 교수의 전문 분야는 세계경제, 통상정책, 경제안보, 지정학 및 지경학, 지역연구 등에 이르며, 오랜 기간 한국 정부의 경제·통상·외교정책 수립 과정에 깊이 관여해 왔다. 주요 활동으로는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 외교부 산하 한중관계미래발전위원회 경제통상분과 위원장, 경제부총리 보좌관, 한-EU FTA 협상자문위원 등을 맡았다. 또한 G20 관련 기획재정부, APEC 및 한국 외교전략 관련 외교부, ASEM 및 브렉시트 대응과 관련한 산업통상자원부의 주요 정책 자문을 수행했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는 산업통상자원부 정책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김 교수는 WTO, OECD, EU, UN 등 주요 국제기구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어왔으며,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주요 국제회의 및 민간 포럼에 초청받아 연설을 해왔다. 참여한 주요 포럼에는 미국의 Opinion Leaders Seminar, 잘츠부르크 글로벌 세미나(미국/유럽), 중국발전포럼, BOAO 포럼, 인도의 Raisina Dialogue 및 Kautilya 경제포럼, 프랑스의 World Policy Forum, 러시아의 Valdai 포럼, 카타르의 도하포럼, 덴마크의 코펜하겐 민주주의 정상회의, WTO 포럼, EU-아시아 학술회의, 모로코 Atlantic Dialogues, 남아공 Cape Town Conversation, 아르메니아 Yerevan Dialogue, G7 및 G20 연계 Think7/Think20 등이 있다. 김흥종 교수는 UC 버클리에서 풀브라이트 펠로우로 연구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서 Honorary High Table member로 지냈다. 프랑스 IFRI, 벨기에 VUB, 고려대, 터키의 마르마라대학교 등에서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지금까지 110편 이상의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으며, 국내외 언론, 방송, SNS 등을 통해 활발히 발언해 왔다. 서울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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