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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세력권 정치 시대의 생존 전략

작성자
윤영관
조회
46
작성일
26-02-0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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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매체를 통해 접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고통 당하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다.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에 나라를 잃고 서러움과 고통에 몸부림치던 우리 선대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서방 언론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고통에 견디다 못해, 영토를 내주더라도 안전 보장만 되면 휴전하자는 여론이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자국 군대가 아직 점령하지도 못한 도네츠크 지역까지 역사적으로 자국 영토라며 요구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그곳을 확보해서, 국민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할 생각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거의 끊었고, 그나마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유럽은 아직 러시아를 억제할 만큼 독자적 국방력이 충분치 못하다.

 

만일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담합하여 우크라이나에 불리한 종전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전 세계가 세력권 정치의 시대로 본격 진입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트럼프 행정부가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하고 그린란드 확보를 위해 한때 무력 사용도 불사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미국이 서반구에 자체 세력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다수였다. 물론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의 주장대로 “강대국 메뉴판의 요리가 되지 않기 위해” 중진국들이 단합해 이러한 흐름을 거부한다면 모르겠지만 아직 뚜렷한 징후는 없다.

 

세력권 정치는 강대국들이 소국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타협과 담합을 통해 세력권을 분할하는 제국주의적 힘의 외교다. 1905년 일본과 미국 간에 한반도를 놓고 벌어졌던 태프트-가츠라 밀약이나 동구권을 소련 세력권으로 넘긴 1945년 얄타회담이 그 사례였다.

 

세력권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은 세력권 사이에 낀 단층선에 존재하는 나라들이다. 우크라이나·대만·한국이 그렇다. 한국은 동맹을 통해 미국의 세력권 내부에 있으면서도 중국에 가장 가깝게 노출되어 있다. 중국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의 경쟁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반도를 자국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게 전략적 목표였다. 그러나 한국은 계속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해 왔다. 미국이 한국을 6·25전쟁에서 지켜주었고, 핵우산 제공과 경제 및 기술 협력을 통해 한국이 통상 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무엇보다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럼프 2기가 시작되며 모든 게 변했다. 더 이상 민주주의, 동맹, 핵우산 제공 등에 과거처럼 진지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거래의 관점에서 안보 공약이나 주한미군, 북핵 문제 등을 중국이나 북한과의 거래의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안보와 경제를 바라보는 패러다임 자체를 크게 바꿔야 한다. 첫째, 한국은 한·미 동맹 관계를 ‘신뢰’가 아니라 ‘상호 필요성’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거나 거래 대상으로 삼을 때 지불해야 할 비용을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반도체·조선·배터리·원전 등 핵심 공급망에서 한국이 갖고 있는 ‘대체 불가능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분야에서의 한·미 협력을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한국을 버리거나 거래 대상으로 삼지 못하게 만드는 억지 수단으로 삼자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대미 투자 이행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 문제도 애초부터 경제와 안보를 통합적인 관점에서 보고 큰 그림을 갖고 대응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한·미 간 합의 내용을 경제 문제로만 보지 말고 미국이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을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수단 차원에서 보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만은 반도체가 안보 방패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이 TSMC를 중국에 쉽게 넘겨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해서 강대국들에 대한 외교적 레버리지를 키워야 한다. 일본과의 안보협력을 한층 확대하고, 일본·호주·EU와의 안보협력을 촘촘하게 엮어 ‘격자형’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면 ‘우산살(hub-and-spoke)’ 모양의 양자 동맹의 약화 가능성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한·EU 국방파트너십이나 한국·일본·호주와의 3국 협력 등으로 다층적인 파트너십을 짜나가면, 한국의 안보를 강대국 간 거래 대상으로 삼기가 훨씬 힘들어질 것이다. 중국의 자원 무기화를 피하기 위해서도 동남아나 인도, 호주 등과의 공급망 구축이 중요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핵심광물 무역블록’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방력의 자강이다. 세력권 정치에서는 강대국들끼리 서로의 충돌을 피하려고 타협을 통해 ‘안정’을 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틈에서 상대적 소국들 간에는 국지 분쟁이 발생하는 ‘불안정’ 상황이 야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중 세력권 간의 담합이 이뤄져 그들 간의 관계는 좋아져도, 북한의 국지 도발이나 핵 위협이 가능하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국방력의 자강이 필수적이다. 우리의 재래식 정밀타격 능력과 위성 감시망을 강화해서 북이 치명적 대가를 치르게 할 독자적 억제력을 키워야 한다.

 

결국 ‘미국 없이는 안 되지만, 미국도 한국 없이는 안 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다가오는 험한 세상에서 한국의 생존 전략이다.

 

 

* 본 글은 27일자 중앙SUNDAY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윤영관

이사장

윤영관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사장이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입니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서울대학교에 임용되기 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에서 3년간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또한 한국미래전략연구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고, 한반도 평화연구소의 창립 회원이자 이사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동아시아 비전그룹 II 공동의장(2011-2012)과 국회의회 외교 자문위원회 위원장(2019-2020)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국제정치경제, 한국 외교정책, 남북관계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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