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평양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의 핵 포기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최고 결정권자인 김정은의 속내를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한국이 비핵화 외교에만 매달린 데는 북한 지도자의 본심을 몰랐던 게 큰 원인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갖고 비핵화 외교에 매달린 반면, 북핵 위협에 대응한 안보 대책은 도외시했다. 이번 정상회담은 북한의 핵 포기 의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 매우 미흡한 비핵화 조치로 타협했던 과거 실패한 비핵화 외교의 재판이다.
평양공동선언은 판문점선언과 같이 핵 문제를 마지막에 둠으로써 남과 북의 정책 우선순위를 분명히 했다. 핵 문제는 기본적으로 미·북 간에 해결할 사안인 만큼, 비핵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모양새만 갖춰도 남북관계 개선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비핵화 조치가 부실한 가운데 한국이 북한 편에 서는 인상을 줌으로써 우리의 국제적 이미지와 신뢰도가 추락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 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5항)으로 만들자는 것은 김정은이 지난 5일 우리 특사에 했던 말이다. 한반도를 핵무기 없는 땅으로 만들려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탈퇴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면 된다. 한국의 핵 개발 포기와 주한미군의 전술핵 철수는 이미 오래전에 실현됐다. ‘핵 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은 핵 위협의 근원인 주한미군과 한·미 동맹이 존재하는 한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동창리 미사일 엔진시험장과 발사대를 전문가 참관 속에 폐기한다는 것은 풍계리 핵실험장의 셀프 폐기가 초래한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엔진시험장과 발사대 폐기는 일반인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순한 물리적인 조치다. 다시는 새로운 시설을 짓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볼 수도 없다.
미국의 조치를 조건으로 영변 핵시설을 폐기할 수 있다는 것도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케 만든다. 미국에 공을 던지는 조건부 폐기일 뿐 아니라, 영변에 국한된 폐기는 미국의 요구에 크게 미달하기 때문이다.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말대로, 미국은 북한이 1년 안에 핵 폐기를 완료할 것으로 믿고 정상회담을 가졌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비핵화 실무회담이 다음 주에 열릴 것이라는 등 희망적인 발언을 쏟아낸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영변 핵시설은 고농축우라늄 생산시설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명이 다한 노후 시설이다. 영변은 핵무기의 원료를 생산하는 곳으로, 미래 핵에 해당한다. 북한이 별도의 농축 시설을 가동하고 있기 때문에 영변 핵시설 폐기는 미래 핵의 일부를 없앨 수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수십 개의 핵탄두(현재 핵)와 연간 6개 정도 생산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핵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비유컨대, 비핵화 기차에 탄 한국은 ‘남북한의 핵 개발 포기’가 목적지임을 분명히 했지만, 북한은 아직 한 번도 목적지가 같다고 말한 적이 없다. 한국이 먼저 핵을 포기하고 비핵화 기차에 탄 채 전진과 정지, 후진을 반복하며 지난 30년을 지내온 결과 우리 국민은 북한 핵의 인질 신세가 됐다. 이번 회담에서 김정은이 행선지를 분명히 밝힐지 모른다는 기대도 물거품이 됐다. 재래식 군비 통제로 가공할 핵 위협을 덮을 순 없다. 세 차례 정상회담은 북핵에 대응한 확실한 안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국민적 각성의 기회가 됐다.
* 본 글은 9월 20일자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전성훈
객원연구위원
전성훈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객원연구위원이다. 고려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포드대학교에서 공업경제학 석사와 캐나다 워털루대학교에서 경영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의 주제는 군비통제 협상과 검증에 대한 분석이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국가안보실 대통령 안보전략비서관으로 재직하면서 대한민국의 중장기 국가전략과 통일•안보정책을 담당하였다. 1991년부터 2014년까지 통일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선임연구원, 연구위원, 선임연구위원을 거쳐 제13대 통일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남북관계, 대북정책과 통일전략, 북한 핵문제와 군비통제, 국제안보와 핵전략, 중장기 국가전략 등이다.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에서 근무했고,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국방•통일분과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국방부, 통일부,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의 정책자문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정치학회와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2000년부터 2013년까지 자유아시아방송 한반도 문제 논설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국무총리실 산하 인문사회연구회의 우수연구자 표창을 연속 수상했고, 2003년 국가정책개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