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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미국이 세기적인 거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17세기 이후 세계 패권국들의 부침에는 일정한 리듬이 반복되어 왔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은 모두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제조업과 무역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루며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점차 사회 내부에 이익 집단이 축적되고 제도적 경직성이 심화되면서 패권국 후기에는 금융과 서비스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공통의 궤적을 그렸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는 뛰어난 조선 능력과 항해술을 기반으로 해상 운송을 통해 세계 무역을 지배했다. 동인도회사는 전성기에 암스테르담 주식시장에서 그 가치가 7700만 길더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의 다른 모든 회사를 합친 것보다 큰 규모였다. 그러다가 서서히 금융 중심 경제로 바뀌었다. 튤립 투기 광풍(1636~37년) 당시, 희귀종 튤립 알뿌리 하나가 암스테르담 도심의 집 한 채보다 비싸게 거래되었다고 한다.
영국은 1차 산업혁명 당시 증기기관 등 선진 기술을 개발하면서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1870년대에는 제조업이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40%를 차지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런던의 금융 시장인 ‘시티 오브 런던’은 전 세계 자본 시장 및 무역 결제의 허브로 성장했다. 자동차 등 새로운 기술 발전의 초입에서 맨체스터의 공업지대는 자본 투자에 목말라했다. 그럼에도 런던의 금융가들은 그들의 자본을 독일과 미국 등 해외에 투자하여 미래 도전국들의 제조업 발전에 기여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제조업을 통해 세계 경제를 이끌었다. 1950년에는 미국 전체 노동 인구의 약 35%가 제조업에 종사했지만, 지금은 8% 수준이다. 반대로 서비스업 종사자는 80% 수준이다. 미국 경제의 중심이 자동차, 철강, 조선 등의 제조업에서 월가의 금융, 실리콘밸리의 IT산업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러한 구조 변화는 세계화를 통한 글로벌 분업과 중국 등 신흥국으로의 생산 외주 확대로 더욱 심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득을 본 것이 중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패권국의 전통적인 경제 변동의 경로를 되돌리려 하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목표 아래 제조업의 재부흥을 꿈꾸고 있다. 지난 4월 2일 약 60개국을 대상으로 최소 10%의 일반관세와 차등화된 고율의 상호관세를 부과했다. 그러면서 높은 관세율을 피하고 싶으면 미국에 투자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대해 유럽연합(EU)은 6000억 달러, 일본은 5500억 달러, 한국은 3500억 달러의 투자를 약속했다. 이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패권 회복, 역사 되돌리기 프로젝트는 미국 국내 정치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금융·IT 등 고학력 서비스 종사자들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블루 스테이트 대도시에 집중되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농업지대와 러스트 벨트의 백인 중저학력 노동 계층, 그리고 일부 경합주 유권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되찾았다. 이제 그는 미국 경제가 금융·서비스에 과도하게 기운 구조를 보완하고, 제조업과 생산 부문의 비중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트럼프의 거대한 미국 제조업 재건 프로젝트에 한국이 깊이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조선에서 세계 1~2위, 자동차에서 3위, 원전에서 5위권 내외를 달리고 있다. 즉 미국의 입장에서 제조업 부흥에 최적 파트너인 셈이다. 한국도 미국 제조업의 부흥을 통해 한국 경제의 활로 개척과 동맹 강화를 기대하고 있다.
이처럼 거대한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양국 간의 파트너십이다. 어느 한쪽의 강압이 아니라, 상호 간의 진정한 이해와 신뢰에 기반할 때 세기적 프로젝트에 걸맞는 강력한 파트너십 형성이 가능해진다.
아쉽게도 미국 정부는 그러한 파트너십 형성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자국의 MAGA 프로젝트의 실현을 위해 조지아주에서 자동차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던 316명 한국인 기술자들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와 구금 사례가 있었다. 필수 기술 인력들의 유치를 위해 한국 정부나 기업들이 요청했던 비자 발급 요구는 외면해 왔다.
서비스업 인구 80%의 미국 경제에서 숙련된 기술 인력을 찾기가 힘들다는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제조업 부흥과 이민 통제라는 두 가지 목표가 충돌하는 사이에서 적절한 접점을 찾아야 한다. 투자 기금과 관련해서도 한·미 간 스와프 협정 체결을 고려해야 하고, 규모와 사용 용도 그리고 수익 배분에 관해서도 충분한 협의가 필요하다. 이 두 사건으로 한국 국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
트럼프 행정부의 지도자들은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미국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이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한국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한국은 반세기 넘게 미국과 피와 희생을 나눈 가장 헌신적인 파트너였다. 미국이 ‘다시 위대한 나라’로 거듭나길 원한다면, 한국을 압박의 대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오만이 아니라 존중, 불신이 아니라 신뢰를 보여줄 때 미국은 진정으로 강해질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말은 지금의 국제 정치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동맹은 우리의 힘을 약화시키는 부담이 아니라, 우리의 힘을 배가시키는 자산이다.”
* 본 글은 9월 20일자 중앙SUNDAY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이사장
윤영관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사장이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입니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서울대학교에 임용되기 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에서 3년간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또한 한국미래전략연구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고, 한반도 평화연구소의 창립 회원이자 이사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동아시아 비전그룹 II 공동의장(2011-2012)과 국회의회 외교 자문위원회 위원장(2019-2020)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국제정치경제, 한국 외교정책, 남북관계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