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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정책대화] 정몽준 명예이사장 개회사
일시: 2025년 10월 15일 오전 9시
장소: 일본 도쿄 국제문화회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산정책연구원 명예이사장 정몽준입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님, 이혁 대사님, 짐보
켄 아시아퍼시픽이니셔티브(Asia Pacific Initiative, API) 대표님
한일 양국의 우호와 협력을 위해 노력해 주시는 내외 귀빈 여러분, 바쁘신 와중에도 오늘 회의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본은 저에게 인연이 깊은 나라입니다. 저는 약 40년전 Johns Hopkins SAIS라는 미국 대학원에서 일본에 대해 공부했고, 일본어도 배웠습니다. 저의 아내의 아버님은 초대 주일 한국대사이셨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80주년, 그리고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동시에 맞이하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 뜻깊은 해에 아산정책연구원과 아시아퍼시픽이니셔티브(Asia Pacific Initiative, API)가 “한일관계 60년,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한일 양국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60년 전 한국내에서는 일본과의 수교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있었지만 정치지도자는 쉽지 않은 결단으로 국교 정상화를 통해 양국 관계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통과 상처도 있었으나, 양국 국민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왔습니다.
이제 경제·문화·인적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웃이 되었으며, 최근에는 상호 호감도와 친근감 또한 꾸준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2년 전에 개최된 <2023 한일정책대화>에서 저는 한국과 일본이 “가깝고도 먼 이웃”이 아니라, “가깝고도 가까운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적 있었는데, 우리는 아직 채워야 할 ‘물컵 반잔’이 남아 있음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최근 2025년 6월 요미우리 신문과 한국일보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응답자의 55%, 일본인 응답자의 52%가 현재의 한일관계가 ‘좋다’고 평가하였지만, 강제징용문제의 해결을 위한 ‘제3자 변제’ 해법에 대해서는 한국인 응답자의 ‘57%’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위안부문제와 강제징용문제 등 과거사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성의를 보이고 있지 않고 있다는 한국인들의 인식을 반영한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한일간의 수많은 교류와 노력에도 양국이 풀지 못한 위안부문제, 강제징용 등과 같은 역사문제는 언제든 양국관계를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일관계에 정통한 팬실바니아 대학의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위안부는 20만명, 강제징용은 200만명, 강제징병은 20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일관계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일본의 보다 성의 있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나머지 반잔을 채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아픈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 그리고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에서 비롯될 수 있는데, 일부이지만 일본 정치인들이 강제징용의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강제징용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사건입니다. 강제징용과 관련하여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국가간 합의와는 별도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시했습니다. 이는 피해자 개인의 권리와 존엄이 무엇보다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총 240분인데 현재 6분만이 생존해 계시고 모두 90세가 넘었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진정성 있는 사과와 실질적인 보상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배려하고, 진심을 다하는 노력, 그리고 미래세대에도 올바른 역사의 교훈을 물려주겠다는 약속 이야말로 양국 관계의 신뢰를 쌓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
지난 8월, 이재명 대통령께서 한국의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일본 정부가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양국 간 신뢰가 훼손되지 않게 노력해 줄 때 서로에게 더 큰 공동 이익과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것으로 믿는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기대를 반영한 것입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지난 수십년간 우리는 북한의 핵 도발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목도해 왔습니다. 중국과 러시아의 비협조로 효과없는 대북제재와 김정은의 핵집착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북아 지역의 안보 환경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 및 정치적 밀착은 이 지역의 안보환경에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서 중국-러시아-북한 정상은 3각협력을 과시함으로써 동북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상황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도전은 한국과 일본, 미국의 협력을 비롯한 유사입장국(like-minded countries)들간의 긴밀한 연대와 공동 대응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반도체, 배터리, AI, 바이오 분야의 기술혁신과 기후변화, 친환경에너지 전환, 저성장과 인구구조 변화 등 다양한 글로벌 도전 속에 한일 양국의 협력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엄중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이제 한국과 일본의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고, 한일협력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북한 핵위협을 비롯한 한반도와 지역의 다양한 안보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이제 한국과 일본은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협력의 틀을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시바 총리는 작년 9월 “우크라이나의 오늘이 아시아의 내일이다”라고 하면서 아시아판 NATO 설립을 제안했는데 저는 이에 공감합니다. 아시아판 NATO의 설립으로 역내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이 참여하는 집단안보체제의 구축이 절실한데, 한국과 일본이 함께 이 길을 열어 나가야 합니다.
NPT라는 현재의 국제 비확산체제를 존중하면서도 북한의 핵위협에 대한 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 초반 한반도에서 철수한 미국의 전술핵을 재배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국은 냉전이후에도 유럽에 100여기가 넘는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는데, 유럽보다 더 심각한 안보상황에 놓여 있는 동북아에서 전술핵무기가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한국내에서는 우리도 핵 잠재력을 가져야 한다는 여론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동시에 핵잠재력을 강화함으로써 인도-태평양 지역 동맹 핵전력을 구축한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총리 시절 비핵 3원칙을 천명했지만, 이제는 북한을 비롯한 권위주의 체제의 핵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의 만남이 한일관계의 또 다른 60년, 그리고 동북아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새 출발점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자리가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뜻깊은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많은 분들의 지혜와 건설적인 제언이 양국 우호와 협력의 큰 밑거름이 되리라 믿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위 연설문은 정몽준 아산정책연구원 명예이사장의 '2025 한일정책대화' 개회사 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