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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지만, 안보 분야에서의 침묵은 상대방의 잘못된 인식과 오판을 초래할 수 있기에 때론 독(毒)이 될 수 있다. 한 국가가 자국의 정책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법은 최근 들어 상대방 청중의 의식을 조종하는 ‘인지전’(cognitive warfare)이라는 개념으로까지 발전했다. 인지전이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 개념이다.
북한은 지난 26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 보도를 통해 공개한 8700t급 ‘핵동력전략유도탄잠수함’(SSBN·핵잠)이 한국의 원자력추진잠수함(SSN·원잠) 대응용이라는 논리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김정은은 우리의 원잠 건조 계획이 자신들의 안전과 해상주권을 엄중히 침해하는 ‘공격적 행위’이므로, ‘반드시 대응’해야 하기에 전략핵잠수함 건조가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핵잠 건조 논리가 선후 관계를 심각하게 오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지난 2021년 1월의 8차 노동당대회에서 ‘국방력 발전 5대 과업’의 하나로 전략핵잠수함 건조를 제시했다. 이는 북한의 핵 개발을 고려했을 때 뭐라고 변명하든 핵 투발 수단의 다양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3월에는 김정은이 그 건조 현장을 시찰했으며, 이번에 거듭 현지지도를 통해 그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북한의 행위는 누가 보더라도 불가피한 대응 행위가 아니고, 선제적 위협이며 협박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핵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북한의 핵잠 건조에 대해 지금까지 제대로 된 반박문 한 장 내지 않고 있다. 현 정부의 이러한 침묵은 처음이 아니다. 한미 간의 원잠 협력에 대해 중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훼손’을 우려한다는 입장을 거듭 내놨지만, “우리 계획은 재래식 무장”이라는 미온적인 반응에 그쳤다. 그동안 북한의 ‘합리적 안보 우려’만을 강조해온, 그리고 우리의 방어적 군사력 건설에 대해서만 유독 문제를 제기해왔으며, 근래에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단어 자체를 애써 외면해온 중국의 행태에 대해서도 뜨뜻미지근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사회 일각에서는 어차피 우리가 묵묵히 갈 길을 가면 되고, 한반도 평화를 추구하는 마당에 굳이 중국과 북한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소통해야 할 대상은 상대 정권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대응은 극히 위험한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방이 이러한 침묵을 자신들의 논리에 대한 시인으로 곡해할 수 있고, 한미동맹과 우리의 군사력 건설이 한반도 위기를 자초한다는 국내 일각의 왜곡된 주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 정당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원잠 사업이 과연 지속가능하겠는가.
우리는 북한과 중국의 긍정적 변화를 바라지만, 외부의 자극 없이 그리고 정확한 정보의 유입과 확산에 의한 자기 성찰 없이 권위주의·전체주의 체제가 주민 스스로 각성해서 변화한 사례는 없다. 상대방의 선의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침묵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설득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도 가능하다.
* 본 글은 12월 29일자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부원장, 수석연구위원, 센터장
차두현 부원장은 북한 문제 전문가로서 지난 20여 년 동안 북한 정치·군사, 한·미 동맹관계, 국가위기관리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실적을 쌓아왔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현안팀장(2005~2006), 대통령실 위기정보상황팀장(2008), 한국국방연구원 북한연구실장(2009)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의 교류·협력 이사를 지냈으며(2011~2014) 경기도 외교정책자문관(2015~2018),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2015~2017),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2017~2019)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 겸 수석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객원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국제관계분야의 다양한 부문에 대한 연구보고서 및 저서 100여건이 있으며, 정부 여러 부처에 자문을 제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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