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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한국 외교, 멀리 보고 크게 플레이해야

작성자
윤영관
조회
45
작성일
26-04-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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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작년 4월 관세 폭탄, 올 초의 베네수엘라 마두로 체포, 그린란드 점령 시도, 급기야 이란 전쟁으로 규범과 법이 아니라 힘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80년간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주도해 온 미국이 그랬기에 그 충격이 엄청나다.

 

중요한 것은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이제 미국도 못 믿게 되었으니 중국에 베팅, 즉 탈미입중(脫美入中)을 해야 하나?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앞으로 힘이 주도하는 세상으로 바뀌어 갈 때 가장 가능한 국제 정치 시나리오가 세력권 질서다. 미국-유럽 관계가 악화되어, 미·중 중심의 신냉전 질서로 갈 것 같지는 않다. 세력권 질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이 자기네 대륙에 각자 세력권을 형성하고 힘센 자기네들끼리 협상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면 평화가 온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과거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서로의 세력이 부딪치는 경계 지역을 놓고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19세기 내내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를 놓고 벌어진 영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분쟁, 20세기 초 발칸반도를 놓고 벌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1차 대전 촉발 등 그 사례는 많다.


세력권 역내에서 벌어지는 일도 중요하다. 세력권은 기본적으로 최강국을 정점에 놓고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 세력권 밖 외부 국가들의 개입이 차단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역 패권국은 자국 세력권에 속한 약한 국가들에 대해 간섭하고 무력 개입까지 한다. 소련 공산주의 세력권에 속했던 헝가리에서 1956,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68년 민주화 저항운동이 일어나자, 소련은 무자비하게 군대로 진압했다. 이때 미국과 서방은 방관했다.

 

게다가 권위주의 강대국의 세력권에 속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치 체제 유지도 힘들어진다. 민주주의 국가가 이웃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역 패권국의 권위주의 정치 체제 유지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개입을 통해 민주주의 와해의 방향으로 압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주요 의도 중 하나였다. 우크라이나의 국민이 단결하여 5년째 처절하게 싸우는 이유, 폴란드와 체코 등 동구권 국가들이 불안에 떨며 한국산 무기를 대량 구입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은 권위주의 국가들인 러시아, 이란, 북한과 연대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약화를 추구해 왔다. 그것이 중국의 대외 전략의 기본이다. 그 틀 안에서 한국을 미국에서 떼어내 자국의 세력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한반도 정책의 핵심이다. 그러한 중국의 세력권에 들어가면 국제 규범과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소망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지금 한국은 무역, 투자, 기술 측면에서 서방과의 연결고리가 훨씬 두텁다. 예를 들어 한국의 반도체 산업도 설계, 장비, 시장 측면에서 미국과의 협력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전제 조건이다.

 

그래도 미국이 저렇게 변해버렸는데 어쩌란 말이냐? 이유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우리만의 중대 변수가 있는데 바로 북한의 위협이다. 확실한 것은 김정은 정권은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의 정책이나 의도에 상관없이, 번영하는 민주국가 남한이 바로 옆에 붙어있다는 사실 자체를 체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남으로부터의 체제 위협을 최대한 차단하겠다는 것이 ‘적대적 2국가론’의 본질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점을 냉철하게 인정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핵 무장한 북한의 위협을 억제할 방도가 필요하고, 그래서 미국의 세계 전략이 어떻게 바뀌든, 아직도 한국에게는 미국이 필요하다. 안보는 국가의 생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거래적인 지도자이고, 구한말과 달리 지금 우리에게는 미국과 거래할 카드가 있다. 그 카드가 조선, 원전, 반도체, 방산 등 우리의 제조업 능력이다. 문제는 얼마나 능란하게 이 카드를 활용해서 미국의 지속적 핵우산 제공이라는 안보 목표를 확보해 낼 것이냐다.

 

세력권 정치 시대로의 진입은 다음의 경우 더욱 빨라질 것이다. 이란 전쟁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더욱 쇠퇴하고, 미국의 비협조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고, 미국이 그린란드 확보를 다시 시도해서 미국-유럽 관계의 단절이 확실해지는 경우이다. 다음 달 미·중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경제적 이익을 대가로, 중국에게 대만 문제와 관련한 양보를 하는 경우도 그럴 것이다.

 

이처럼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전략은 우리처럼 규범 기반 국제 질서의 유지를 원하는 민주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하는 일이다. 그중 우선적으로 일본 및 인도와의 관계를 크게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우리와 대부분의 고민을 공유하는 동병상련의 국가다. 서로 연합하면 양국의 대외전략적 입지가 강화된다. 그리고 인도는 147000만 인구의 잠재 대국이자 글로벌 사우스의 대표 주자이다. 한국이 영국, 프랑스가 주도하는 호르무즈 관련 정상회의에 참여해 국제 연대를 강화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향이다.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좁은 지정학적 사고의 틀을 뛰어넘어 멀리 보고 크게 플레이할 때다. 험한 세상이 올수록 냉철한 판단과 전략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 본 글은 418일자 중앙SUNDAY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윤영관

이사장

윤영관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사장이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입니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서울대학교에 임용되기 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에서 3년간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또한 한국미래전략연구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고, 한반도 평화연구소의 창립 회원이자 이사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동아시아 비전그룹 II 공동의장(2011-2012)과 국회의회 외교 자문위원회 위원장(2019-2020)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국제정치경제, 한국 외교정책, 남북관계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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